2011년 3월 1일 (로토루아)
새벽에 일어나 깔끔한 로토루아 시내를 산책했다.
"여행은 죽음의 신이 휘두르는 거대한 낫이 생(生)의 밧줄을 끊어 버릴때, 최후로 출발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에 나오는 글귀를 떠올리며 어슴프레한 주택가 골목길을 어슬렁 거리니 몇 일 되지도 않은
이번 여정이 벌써 한달 정도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나를 떠나게 부추긴 것은 우선 너무 오래도록 얌전히 생활하면서 억눌러온 모험에 대한 갈증이었다" 는 그의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또 "느리게 걸어야만 여행의 마법같은 순간을 잡을 수 있을테니까요" 라고 한 그의 도보 여행 원칙과는 배치되는 여행을 우리는
지금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물론 그의 말 들에 깊이 동감한다.
로토루아 시내는 그야말로 관광의 도시다.
그렇지만 한국의 관광지와는 풍경도, 사람도, 건물과 그 건물의 간판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잘 꾸며진 가로수와 도로, 집들과 상점들 앞의 도보길과 잔디밭, 멋있는 불빛과 정돈된 모든것들이 자꾸만 한숨이 나오게
한다.
남의 나라에 왔으면 남의 나라의 분위기에 빠지만 그만인데 내 속에선 왜 자꾸 한국의 '그것'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있을까?
한국의 관광지..... 원색의 간판으로 도배된 건물들과, 그 간판도 모자라 출입문에 조차 도배된 글귀들, 무질서한 도로변의
판매대와 음식들, 숙박업소들의 그 뻔뻔한 분위기 등등.....
이곳에 와서 '나는 참 한심스런 나라에 사는구나' 하는 자괴감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야, 이 녀석아! 여기는 여기고 우리는 우리야! 좁은 땅덩이에서 각자 할애된 작은 공간에서 작은 자본들로 먹고 사는데에
급급한 5천만의 인구가 박 터지게 사는 우리가 이 넉넉한 놈들과 같아? 짜식아!" 하면 뭐 할 말이 있겠는가.
그 와중에서도 "그래도 품위라는게 있잖아!" 하면 "인간적 품위? 그런건 지나가는 똥개에게나 줘 버려!" 하면.... 할 말 없다.
아침을 챙겨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자(뉴질랜드 모텔의 99%는 씽크대와 부엌 집기들이 다 갖춰져 있다) 모텔 주인 아줌마가
왔다. 그런데...... 한국 아줌마다! 우리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소인 줄 모르고 들어 왔다. 어제 안내대에서 우리를 맞은
젊은이는 약간 정신지체자인 것 같았고 영어로 우리를 맞아 동양인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은 몰랐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나 이 집 주인예요" 하는데 경상도 억양까지.....그때부터 이 아줌마의 수다가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불과 10분
만에 이 아줌마의 거의 모든 신상을 다 파악해 버렸던 것이다.
자폐아인 스무살이 넘은 아들과 둘이서 모텔을 꾸려 나가는 이 억척 아줌마가 우리에게 들려 준 얘기는 이러했다.
한국의 진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어찌어찌 결혼을 했는데, 자폐아인 아들을 낳고는 우리나라 특유의 '장애아 키우기
어려운 환경'에 질려 이민을 결심, 뉴질랜드로 흘러 들었단다. 로토루아에 기반을 잡아 모텔을 시작하여 돈도 어느 정도
벌었는데, 여기서 역시 한국인인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룸펜 수준의 이 남자가 또 다른 여자를 떡하니 대동하고 나타나는 통에 판이 깨져 이제는 혼자 살고 있다는.......
여기서는 장애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없고, 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어 주(週)별로 장애자 수당이 나오고, 교육과 의료가
무료이고 돌보는 엄마인 자기에게도 수당이 지급되어 아무런 불만이 없단다.
우리는,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속내를 다 털어내도록 순진한 이 아줌마에게 얼마간 살짝 매료 당하고 말았다.
억척스러우며 열정적이고, 피곤이 베인 얼굴속에 간혹 퍼지는 선량하고 순진한 미소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이민생활 20년이 된 아줌마는 이곳생활을 묻는 우리를 상대로 열심히 설명한다.
"여기는 치안이 어때요?"
"치안요? 여기는 치안이랄게 없어요. 좀도둑이 있긴 하지요. 그렇지만 한국처럼 강도나 사기, 엽기적 살인 따윈 없어요"
"한국의 소식을 자주 접하나봐요?'
"그럼요! 인터넷이 있잖아요. 그런데요, 한국의 뉴스 하루치를 보면 뉴질랜드 뉴스 일년치를 모두 한꺼번에 보는 것 같아요.
사기, 강도, 살인, 사고, 파업, 정치인들의 부패, 북한과의 충돌, 자살..... 한국의 자살율이 세계 1위 라면서요?'
"........."
"다이나믹 코리아 예요. 호호호..... 너무 재미있어요. 한국의 뉴스 자체가 너무 재미 있거든요. 여긴 뉴스랄게 없어요.
요즘 크라이스트 처치의 지진이 뉴스의 전부죠. 지진이 없었다면 뉴질랜드의 뉴스..... 정말 재미 없거든요. 그런데 한국은 왜
그렇게 사기 사건이 많을까요?'
"......."
나도 모르겠다. 왜 그렇게 사기 사건이 많은지.....
우리는 로토루아 지열(地熱)지대 두 곳을 거금 40불씩 주고 입장했다. 곳곳에 산재한 구멍에서는 가스와 수증기가 치솟고
유황냄새는 코를 찔렀다. 그렇지만 뉴질랜드를 소개하는 관광책자에서 너무 많이 봤는지 별 감흥은 없다.
다만, 커다란 호수 같이 지하에서 뿜어져 나와 있는 초록과, 주황, 녹색과 청색이 섞인 웅덩이는 볼 만하다.
새삼 모텔 주인 아줌마의 조언이 생각난다.
뉴질랜드에서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관광지 보다는 입장료가 없는 관광지가 훨씬 볼 것이 많다고 하는 요상한 말 말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곳은 사람의 손이 들어 간, 말하자면 인공적인 요소가 많은 관광지는 인건비가
많이 투입 되었으므로 비싸게 받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경관은 아무리 크고 방대해도 입장료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 참 의식의 발상이 재미있다. 뉴질랜드는 자연을 가능한 그대로 두고자 하는 노력이 굉장하므로 자연에 인공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공사를 거의 하지 않으므로 입장료를 내는 관광지가 별로 없다는거다.
지열지대는 안전을 위해 여러 시설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게 한 것 같다.
자동차 도로에서 뉴질랜드의 이정표에 질려 버렸다.
워낙에 친절한 우리네 표지판에 적응됐기 때문인지는 모르나(우리나라는 정말 표지판과 도로는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지 않은가!
명박님을 위시한 토목맨 들이 얼마나 불철주야 공사판을 벌리시는가 말이다......) 이곳의 이정표는 우리에게 너무도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표적으로 삼을 건물 하나 없이 100킬로미터 정도를 달리다가 전혀 예고도 없이 목적지 이정표가 불쑥 (그것도 조그맣게)
지나가 버려 차를 돌리기 일쑤고, 어디어디 까지 50킬로 어쩌고 했는데 중간에 아무런 표식도 없이 불쑥 목적지가 나오는 식이다.
대체 관광으로 먹고 산다는 나라가 이렇게 이정표나 표식판에 인색하다니......
그렇지만 가만히 보면 이들의 방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된다. 숱한 간판과 표지판, 간판등으로 뒤범벅이 된 우리네
도로보다는 훨씬 덜 어지럽기는 하다.
또한 큰 땅에 작은 인구가 분산되어 그야말로 몇십, 몇백킬로미터씩 떨어져 사는 이들이 굳이 우리네 처럼 빽빽한 표식이 불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결국 사는 환경, 사는 방식과 의식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지만 불친절한 이정표 때문에 아내와 티격태격 하기까지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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