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31)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운농 박중기 2013. 7. 29. 15:16

3월 20일  (히말라야 14좌 등반자, 미안하우!)

 

포카라 시내에서 보이는 마차푸츠레의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2004년 10월의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새벽의 여명과 함께 아스라한 구름위에 꿈속의 거함(巨艦)처럼 떠있던 마차푸츠레를 영원히 잊을 수 없지만, 이곳에서 보는 마차푸츠레는 또 다른 얼굴이다.

 포카라에서 보이는 얼굴은 삼각 뾰족 봉우리다. 그렇지만 ABC 가는 계곡을 오르면서 오른쪽으로 얼굴을 내밀곤 하는 마차푸츠레는 정말 이곳 사람들이 표현하듯 영락없는 피쉬 테일(물고기 꼬리)이었다. 큰 물고기가 역시 큰 꼬리를 하늘을 향해 뻗고 있는 그런 형상인 것이다.

 안나푸르나의 연봉들과 나란히 보이는 이 산은 개중에서 표고로는 낮은 산이지만 단연 주변의 산을 압도하며 치솟아 있다.

 물론 다른 연봉들보다 앞쪽에 위치하므로 그렇게 보이지만  그 자태는 주변을 압도하는 위용과, 거부할 수 없는 품격이 있다.

 그래서, 아침나절 포카라의 북쪽 연봉들을 바라보면 마차푸츠레에 단번에 시선이 꽂힌다. 이 산은 네팔인들이 신성시해서 산악인의 등정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네팔인들이 마차푸츠레 만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게 해 놓은 것이 무엇보다 나를 기쁘게 한다.

 사실 나는 뭐 성취감을 최우선으로 한다든가, 정복욕이 왕성해서 무엇이든 밟고 올라서야만 쾌감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어서인지, 모모 씨의 히말라야 14좌 등정이라든지, 투박한 등산화에 부착된 열 두발짜리 아이젠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그만한 체력도 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하늘을 향해 치솟은 봉우리들의 꼭짓점에 왜 꼭 올라서야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탐스럽고 소담하게 핀 꽃을 꺽어 머리에 꽂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행위 같아서, 알피니스트나 히말라야 14좌 등정을 이뤄낸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나의 체력이 허락한다 해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히말라야의 높은 산들, 안나푸르나, 다울라기리, 에베레스트(네팔어로 서거르마르타), 거네스, 히운출리, K2, 머나슬루 등 하늘을 찌르는 거봉들에 대해 등정을 불허하여 처녀지로(이미 처녀성을 잃었나?) 두면 좋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을 한다. 몰라...... 그게 더 좋지 않을까?

 '흰 소리 마슈! 인간사회의 다양성이라는 게 있는 걸 모르는 양반이구랴.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그 다양성이라는 모체로 인해 발전하고 유지되어 왔다는 걸 모르오? 그 다양성 안에는 정복욕도 있었고, 안주하는 삶도 있었고, 끝없이 도전하는 약동하는 힘도 있었단 말이요. 그래서 에베레스트도, K2도 정복하고 싶었던 걸게요. 당신은 포부가 없고 남의 공적을 시샘이나 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에 불과해!'

 이러면, 뭐 할 말이 없다.

 한국의 TV에서는 70년대부터인가 히말라야나 네팔이 소개될 때에는, 의례히 까마득한 설산을 두터운 파커를 입고 산소 마스크를 한 채 피켈과 아이젠으로 무장하고 힘겹게 꼭짓점에 올라서서 태극기와 네팔 국기, 그리고 등반 비용을 협찬한 회사(주로 등반장비 제조사 등)의 로고 등이 있는 깃발을 흔드는 장면만을 봐 왔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 네팔에, 또는 히말라야에 갔다 왔다고 하면 '대체 그 추운 곳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든지, '이야! 정말 대단해, 우리는 엄두도 못 내겠는 걸' 한다. 뭐가 춥다는 게지? 왜 엄두를 못 내는 게지? 한국보다 위도 상으로 아래에 있는 아열대 기후인데다, 3월의 포카라는, 낮엔 짧은 소매 티셔츠 한 장이면 충분하다는 걸, 그리고 안나푸르나와 랑탕의 계곡에는 엄청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고, 정글을 통과해야 하며, 원숭이들이 나무사이를 타잔처럼 옮겨 다니는 곳이라는 걸 잘 모른다.

 TV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근래엔 또 TV 덕분에 어느 정도 이 굴절되었던 정보가 조금씩 바로 잡아지고 있긴 하다.

 어쨌든 우리의 TV는 히말라야를 '극한의 자연 정복 역사'로 그려 왔다. 그러나 나는 여러 산악인들의 눈흘김에도 불구하고, 그 14좌는 등정불허 조치하고 이후 처녀지로 관리하여, 그 주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봉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정말로......

 하지만 이들 봉우리들을 등반하는 조건으로 네팔 정부가 등반가들에게서 챙기는 입산료가 어마어마 해서 그것이 가능할 일은 사실상 없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슬프게도......

 

 오후엔 포카라의 동쪽 13Km 지점에 있는, 페와 호수 다음으로 큰 호수인 베그나스 호수(Begnas Tal)에 가기로 작정하고 우리는 호텔을 나섰다. 일단 올드 버스 정류장에 가서 베그나스 행 버스로 바꿔 타려고 호텔 앞 큰 길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도무지 버스가 오질 않는다. 그런데 버스만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택시, 오토바이 등 탈 것이 뚝 끊어 진 것이다.

 왜 이러나? 갑자기......

 길가에는 매일 그렇듯이 경찰과 군인들이 총을 휴대하고 서 있고, 그러고 보니 행인도 줄었다. 교통경찰이 긴장한 채 서 있고, 이때 갑자기 지프에 경찰들이 잔뜩 탄 채 소총을 겨누고 달려오고 있었다. 지프에 탄 상급자인 듯한 구레나룻 사나이가 길에 서 있던 경찰에게 뭐라고 지시를 하고는 휑하니 가 버린다. 지시를 받은 경찰은 길가에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 자전거, 빈 택시, 하릴없이 벤치에 앉아있는 네팔리들을 큰 길에서 물러나 골목길 안으로 비키라고 지시한다.

 한 시간 정도 이런 짓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경찰 오토바이를 선두로, 무장한 지프 몇 대, 역시 무장한 군인들을 태운 트럭 두어 대를 앞세우고 검은색 재규어 승용차가 행차한다.

 우리네 60년대나 70년대에 있었던 일이 이곳 포카라에서 재연되고 있다. 경찰이나 군인들은 외국인에게는 어떤 지시를 하거나 통제를 가하지 않았다.

 그 참...... 도대체 무슨 몹쓸 짓을 많이 했기에 길거리에 자기네 동족이 벤치에 앉아있는 것 까지 두려운 걸까?

 방금 행차한 사람은 평소에 덕행을 많이 베푼 사람은 아닐 거야. 덕행을 많이 베풀었다면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지 않아도 자기 신변을 해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믿진 않을 테니까......

 '여보슈! 꼭 그렇진 않아! 예전에 저격당한 교황은 뭐, 덕행을 쌓지 않고 나쁜 일만 해서 저격을 당했수? 세상엔 별의 별 인간들이 있으니 방탄유리 속에서 호위를 받지 않았냐 말이야.'

 하긴 뭐, 그 말도 옳긴 해. 그렇지만 이곳 포카라의 '행차'는 그렇게 상냥해 보이진 않는군.

 이 '행차'가 끝나자 곧 교통이 재개됐다. 아마도 레이크 사이드 주(主)도로를 완전히 차단했던 듯 하다.

 

 우리는 이래저래 시간을 허비한 끝에 올드 버스정류장에 갔지만 오늘 중에 돌아오는 버스는 너무 늦어서 없다는 얘기를 듣고는 베그나스 호수를 포기하고, 뉴 바자르를 구경하다 레이크 사이드 행 버스를 타고 돌아와 버렸다.

 버스 안에서 미네와 몇 마디 나누는 것을 들은 한 네팔리 남자가 우리를 유심히 보며 빙긋 웃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결심한 듯,

 "한국사람 이세요?" 하고 너무나 유창한 우리말을 걸어온다.

 "아? 한국분 이세요?" 내가 다시 되묻는다.

 "아니요. 저는 여기 네팔 사람이에요."

 "아, 그러세요. 한국에 계셨던가 봐요?"

 "예. 9년 동안 있었어요. 고생 무지 했지요."

 "이제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예. 이제 여기 살아요."

 고생 무지하게 했다는 이 양반의 말에 가슴이 철렁한다. 나도 모르게,

 "나쁜 사람을 많이 만났나요?" 한다. 그러자 이 양반 빙긋 웃으면서

 "세상엔 어딜 가도 나쁜 사람, 좋은 사람 다 있는 것 아녜요?" 한다.

 이 양반의 표정은 고행 끝에 득도(得道)한 사람 같다.

 우리네 TV에서,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냉대,질시를 일삼는 악덕 기업주를 고발하는 프로그램을 여러차례 본 기억이 있어, 그에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하긴 9년 동안이나 생활 했으니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었겠지. 그의 말이 맞긴 하지만 내 의문점은 그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의 비율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한 달여를 지나면서 느낀 것은 네팔인들의 착한 사람 비율이 우리네 보다 월등히(아주 월등히!) 많겠다는 생각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다는 것이다.

 참 서글픈 생각이군. 누가 내 말 좀 반박해 주시면......

 아까 우리가 올드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베그나스 호수 행 버스를 수소문할 때, 20대의 네팔리 청년이 번잡한 사거리를 이리저리 헤치며 우리를 안내해 주었었다. 그는 내 거듭되는 감사의 말에 '천만에요!' 한마디만 하고 돌아서서 갈 길을 간다.

 어쨌던 네팔리들은 친절하다. 적어도 우리가 만난 네팔리는 전부 그랬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절레절레 흔드는 것에 헷갈리지만 않는다면 별로 문제가 없다. 긍정은 우리와 반대로 옆으로 절레절레, 부정은 또 우리와 반대로 끄덕끄덕 이니 말이다.

 '칠리 파우더 있어?' 절레절레

 '그럼 그린 칠리는?' 절레절레

 '아무것도 없다구?' 끄덕끄덕

 우리가 네팔 입국 초기에 트래킹을 하면서 많은 롯지에서 겪었던 일인데 한 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정보를 얻고는 박장대소 했던 것이다.

 그 네팔리는 우리더러 이랬을 것이다.

 '칠리 파우더도, 그린 칠리도 다 있다는데 왜 이러슈? 싱그운 양반 같으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