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9)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운농 박중기 2013. 7. 29. 15:09

3월 18일  ('주나무니' 씨, 그리고 TV)

 

아침을 먹으러 나가는데 호텔의 문지기 '주나무니 디리빠띠' 씨가 두 손을 옆구리에 딱 붙이고 오른쪽 발을 한번 들었다 소리가 나도록 내리면서 척! 경례를 한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영국군 장교가 하던 그런 경례다.

 야, 이건 참 곤란하다. 이 양반은 아침이나 저녁에 우리가 문 앞을 통과하면 예의 이 경례의식을 반복한다. 여기가 무슨 별 다섯 개짜리 고급 호텔도 아니고 우리가 무슨 정장을 잘 차려입은 신사숙녀 행색도 아닌데 이 양반의 이 의식은 대충하다 그칠 기세가 아니다.

 그렇잖아도 불경기에 손님이 없어 우리만 들락거리기에 어째 영 불편한 참인데, 이 양반의 거수경례는 상당히 곤혹스럽다.

 어쨌든 남으로부터 지나친 경의의 표시에 익숙치 않아 부끄럼 타는 우리에겐 이 양반의 깍듯한 경례가 영 거북살스러워 죽을 지경이다.

 어제 저녁 갑작스런 정전으로 직원에게 양초를 얻으러 갔을 때, 저녁근무 담당 젊은 직원이 자기의 보스(사장)를 마구 추켜세웠다. 이 호텔 보스는 '돈에는 구애를 받지 않는 사람'이며 '직원들과 가족같이 지내며, 통이 큰데다 일본여자가 부인이다'고 하며 보스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나타냈는데, 이 보스(!)가 문지기 주나무니 씨에게 철저한 교육을 시켰는지 모르겠다.

 '우리 호텔은 그다지 최고급 호텔은 아니지만, 손님에게는 최대한 경의를 표해야 해!'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의 근무시간을 보면 기가 막힌다. 24시간 근무인 것이다. 새벽 5시에 잠이 깨어 밖을 나왔을 때도 이 양반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바깥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여하튼 녹색과 청색이 배합된 제복의 이 양반이 출입문 근처에 없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고 진한 눈섭을 가진 선한 인상이었는데 한번은 내가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냐니까 반색을 하며 모자를 챙겨 쓰고는 콧수염을 다듬으며 달려왔다.

 배컴 씨(우리는 이 호텔의 사장을 이렇게 불렀는데, 그는 축구 스타 베컴 같이 머리 가운데를 닭 벼슬처럼 올리고, 더운 한낮에도 불구하고 검은 가죽 재킷과 가죽바지를 즐겨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는, 이 양반을 위해 한 사람 더 고용해 12시간 근무로 줄여주면 어떨까? 그러면 더 존경 받을 텐데......

 오늘 저녁은 주나무니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살짝 들어오기를 시도해 봐야겠다(잘 될지는 모르지만!) 마침 베컴 씨가 들어와서 직원들과 쾌활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구 웃고 떠들며 직원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의 없는 것으로 보아, 젊은 직원의 보스 자랑은 틀림없이 사실일 것 같은데...... 한 사람만 더 문지기를 고용하시지 베컴 씨......

 

 객실에는 TV가 있는데 역시 한국산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인도나 네팔의 방송을 보면 사실 출연자나 배우, 혹은 진행자 등의 말을 별 갑갑함 없이 시청할 수 있다. 무슨 유별난 능력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TV 화면만 유심히 잘 살펴보면 거의 내용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춤과 노래가 굉장히 많은데, 우리네로 말하면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뮤직 비디오 같은 것이다. 대개의 경우 처음에 남녀가 이런저런 과정으로 만나고, 그 다음엔 열렬히 사랑하며 오토바이위에서건, 산마루에서건 한적한 교외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그런 뒤 갑자기 험상궂은 인간들 몇이 등장하고(특히 여자의 부모 쪽이 악역을 많이 맡는다) 둘은 비극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사랑을 훼방하는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그러다 그것을 극복하고 다시 오토바이 위에서나 산마루에서 더욱 열정적인 사랑을 확인한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이 모든 과정이 노래로 이어진다.

 이러니 가사를 몰라도 전혀 갑갑하지 않다. 그저 끝없이 춤과 현란한 동작들과 노래가 이어지는 것이다.

 또, 인도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 거의 70% 정도 방영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들의 뉴스시간은 전혀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방송시간의 2/3 이상이 그러한 춤과 노래이므로 그냥, 마냥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네팔리들이 들으면 나더러 '녀석이 그렇게 음치가 되서야 원!' 할는지 모르지만 TV에 나오는 여자가수들의 목소리가 마치 한사람의 노래를 계속 듣는 것처럼 거의 같다. 특히, 음절 끝머리에 갈라지며 낮아지는 저음은 왜 그렇게 똑 같은지 모르겠다.

 우리가 북한 여자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그들의 한결같은 창법에 어리둥절해 하는 것처럼 인도와 네팔 여자가수들의 창법이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똑 같다.

 옛날, 소년시절 동네 큰 형들을 따라 영화관에 섞여 들어가 보았던 인도영화 '신상(神像)'에서 들었던 그 여자가수 목소리가 어김없이 TV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림잡아 40년도 넘은 것 같지만 단번에 기억난다.

 음...... 그렇지만 인도인과 네팔인이 한국에 와서 여자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나처럼 똑 같게 들릴까? 물론 모를 일이지만 짐작컨대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네 가수들은 각자 나름대로 상당한 창법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아닐거라고? 우리네 최근의 젊은이들 노래를 들으면 '보이스' 보다는 '연주'가 우선이고' '멜로디' 보다는 '비디오'가 우선이니 그렇게 똑 같이 들릴지도? 하긴......

 

 내일은 호텔을 옮기기로 했다.

 여기 글래이셔 호텔이 뭐 불편하거나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의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 때문인데 한 주일 정도 있었으니 그 정도면 꽤 오래 머문 것 아닌가 한다. '일주일이 오래 됐다고? 무슨 변덕이야!' 하면 할 말이 없다. 사실은 이 호텔에는 안 된 얘기지만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는 탓에 오히려 우리가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베드 록' 호텔로 옮기기로 한 것인데, 보아하니 이 호텔은 손님들이 웬만큼 있는 것 같아 '손님이 없어 불편함'은 없을 듯해서다. 아닌게 아니라 손님이 우리밖에 없으니 들락거릴 때도 종업원들이 우리만을 주시하는 것 같아 불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