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를 시작하며....

운농 박중기 2013. 7. 29. 09:30

일기를 시작하기 전에

 

 박중기 입니다.

 이 글을 쓸때의 우리 부부는 우리네 나이로 56세와 49세 였습니다. 젊은 것은 물론 아니고, 그렇다고 아직 늙은이도 아닌, 말하자면 중늙은이였던 셈이지요. 

우리는 떠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역마살을 감당하느라 많은 곳을 여행했었지요. 그러면서 우리의 머릿속에는 항상 설산(雪山)을 이고 있는 히말라야를 동경했습니다. '언젠가는 가고 말테야!' 하면서 말입니다.

히말라야의 랑탕(Langtang)과 헬럼부(Helambu)는 두번째의 네팔 방문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우리는 2004년 10월 처음 네팔을 방문했었지요. '방문했다'는 점잖은 표현은 좀 그렇지만, 그때는 늘 동경하던 히말라야의 어느 한 자락이라도 밟아 볼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ABC(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코스를 택해, 네팔 제2의 도시 포카라(Pokhara)의 인근 마을 페디(Phedi)에서부터 트래킹을 시작, 란드룩(Landruk)과 촘롱(Chhomrong)을 거쳐, 해발 4,130m의 ABC를 다녀왔던 것입니다.

이 코스는 우리나라에서 가는 트래커들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의 트래커 들에게도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또 가장 많은 산행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산행도중 숙소 등 편의시설이 비교적 잘 준비되어 있는 곳입니다.

트래킹 외에도 우리는 카트만두와 그 인근의 유적들과 재래시장 등을 돌아보고 왔었습니다.

그 첫 방문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부터 우리는 심한 후유증을 앓았는데, 뭐, 그것은 몸이 제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다던지 하는 따위가 아닌, 일상생활 중 문득문득, 또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떤 자극 때문이었습니다. 그 자극이란 '그곳을 빨리 다시 가야하는데......' 하는, 조급증에 기인한 심리적 자극이었습니다.

머릿속에는 고도(古都) 박타푸르(Bhaktapur)의 목조 건축물들이 빙글빙글 돌고, 거대한 어썬 바자르(Ason Bazar)의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을 지나가고, 파슈파티나트(Pashupati Nath)의 송장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며, ABC에서 새벽에 우리 눈앞에 신기루처럼 떠 있던 산 마차푸츠레(Machhapuchhre, 6,993m)며, 포카라의 페와(Phewa) 호수가 눈앞에 수시로 어른거리는 그런 증상이었던 것입니다.

참 특이한 경험이었는데, 어떤 특정한 장소를 다녀와서 그곳의 범상치 않은 경관이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난 뒤 한동안 문득문득 떠오르는 경험은 흔했으나, 이번의 경우처럼 허구한 날 튀어나오는 경우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번에는 네팔에 대해 좀 공부를 하고 가자, 그리고 되도록 많은 곳을 보기로 하자.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이끌고 있는지 가서 확인해 보자.' 우리는 한달하고도 보름 정도를 계획했습니다.

2006년 2월 15일 다시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땐 네팔의 정세가 상당히 시끄러울 때여서 잦은 번다(마오이스트 주도의 강제파업)로 군인과 경찰들이 무장한 채 거리에 깔리고, 도로는 검문이 강화되어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카트만두 전역(全域)에서 왕정을 종식시키자는 대규모 군중집회와, 이를 막는 군인과 경찰의 충돌로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이 하야를 선언했습니다.

그 뒤 네팔 정부와 프라찬드라가 이끄는 반군은 10년 이상 1만 3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던 내전을 종식시킬 평화협정에 2006년 11월 서명했습니다.

네팔 왕정의 장래는 총선 뒤 구성될 제헌의회가 최종 결정하지만, 갸넨드라 국왕은 이미 모든 특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사실상 평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06년 말 발표된 임시헌법은 선거 때까지 국가수반의 지위도 국왕이 아닌 총리가 갖도록 했다는군요. 아무튼 우리는 네팔의 시국이 험악할 때 그곳을 다녀온 셈 입니다.

 

이번에는 트래킹 코스를 랑탕과 헬럼부 지역으로 정하고, 트래킹은 15 - 16일, 카트만두와 그 인근지역, 포카라 지역 등을  30일 정도 돌아보는 것으로 계획했습니다.

랑탕계곡은 네팔 히말라야의 중앙부에 위치하며, '세계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계곡'으로 알려져 있고,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이기도 합니다. 또한 랑탕계곡은 1949년 영국인 탐험대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지도상에 공백으로 남아있었던 비경(秘境)의 보고(寶庫)였다고 합니다. 헬럼부는 랑탕계곡의 끝머리와 연결된 지역으로 카트만두 시내의 외곽과 연결됩니다.

 

이번 여행은 아내와 둘이서 했습니다.

1년 4개월만의 두 번째 네팔 행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남기는 글은 뭐,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해도 '주관적'이기 마련입니다. 하기야 '철저한 객관주의적 시각'의 글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글을 쓰면서 주변의 정보는 참고했지만(가이드북, 인터넷, 서적 등) 되도록 그러한 자료, 특히 특정한 장소나 사물 등에 대한 전설이나 유래, 풍습이나 관습에 대한 정보를 인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물론 글을 읽는 이가 '이게 뭐지?' 하는 것의 짧은 이해 돕기는 제외하고요.

다소 종교에 비판적이 된 이번 여행에서 종교에 대한 어떤 소회나 감상주의나 '개똥철학'은 배제하고 느낌 그대로를(그것이 아주 개인적임에도 불구하고) 기술하려고 했습니다.

네팔이나 인도, 티베트 등지의 여행기에 특히, 현지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종교적 감상주의나 소회가 많은 것이 솔직히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도 있습니다.

 

히말라야 트래킹 시에는 가이드와 포터, 요리사(쿡)를 대동하는 사람이 많음을 알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가이드가 있으면 든든하고, 신변상의 위험에 대처하기 쉽고, 여러모로 시간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선입견', 즉, 설명을 듣는여행은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의사 소통에 자신이 없기도 하고요.

우리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쿡을 대동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습니다. 여행이란 현지의 음식을 맛보는 재미도, 모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경제사정에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 트래킹을 시작하면 짐꾼(포터)을 어쩔 수없이 고용해야 하는데(의무사항), 우리는 포터에게 13Kg 이하의 짐만 맡기기로 했습니다. 보통 30Kg 까지 맡길 수 있다고는 하지만 도저히 그 양의 짐은 보기에도 안쓰럽기도 하거니와 그들에겐 힘겨워 보입니다. 우리네 보다 작은 체구에 자신의 덩치만한 짐을 지우고 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30Kg 가까운 짐을 지고 힘겹게 오르는 포터와 마주치면, 그들의 임시 고용주인 트래커가 누군지 자꾸 돌아봐 지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빡빡한 일정을 피했습니다. 일정에 쫒기다보면 여유가 없어지고, 여유가 없으면 여행은 피곤하기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와 네팔 제2의 도시이자 히말라야 트래킹의 거점도시인 포카라, 그리고 히말라야  랑탕계곡과 헬럼부를 우리는 이렇게 다녔습니다.

 

** 카트만두 시내 : 80%는 도보, 20%는 오토릭샤(오토바이를 개조한 탈것)로 다녔음

** 한국 - 네팔 : 인천 - 홍콩 - 카트만두 (경유편 이용)

** 식사 : 전부 현지 음식 사서 먹었음  (당시에는 1인 한끼 약 600원 - 2,000원, 카트만두는 싸고 트래킹시는 고도가 높아질 수록 비싸짐)

** 잠자리 : 카트만두는 4,000원 - 15,000원, 트래킹시는 0 - 1,500원(2인 1실 기준)

                  (0원이라함은 트래킹시 음식을 사먹으면 잠자리를 제공하는 롯지가 꽤 있었음)

 

자! 우리와 같이 히말라야로 떠나 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