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2)발리, 그리고 우붓

운농 박중기 2017. 11. 3. 09:26

2017. 10. 13 (꾸따)


꾸따의 숙소는 의외로 조용해서 편히 잠들것 같았지만 과민했던 신경 탓인지 쉬 잠들지 못하고 뒤척

여야 했다.

꾸따는 해변외엔 내겐 별 감흥이 없는 도시지만, 새벽 1시 30분에 내린 여행자로선 선택할수밖에 없는

동네다. 공항에서 걸어가도 될 정도의 숙소니까.

아침에 일어나 거리를 어슬렁 거렸는데 도무지 눈꺼플이 내려앉아 견디지 못하고 들어와 버렸다.

엄청 덥다. 10월부터 우기가 시작된다더니 습기는 많지만 비는 커녕 하늘은 높고 푸르다.

숙소는 가격대비 상당히 좋다. 수영장이 두개나 있고 객실은 모두 몇개인지 셀수없을 정도다.

(febris hotel & spa / 1박 32,000원 정도)

객실은 굉장히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고, 하얀 침대보가 정갈하다. 방 마다 베란다가 딸려있고 바깥은

활짝 핀 꽂들이 어우러져 있다.

그렇지만 생필품 값은 별로 싸진 않고, 식비도 우리와 비슷하거나 약간 싼 정도. 맥주값은 우리보다

비싸다.


그런데 어젯밤엔(아니 오늘 새벽에) 웃지못할 일이 있었다.

'나의 늙음이 여행에 미치는 영향'이라고 해야 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발리 공항에서 내리자 택시를 타기 위해 우선 10불만 환전했다. 공항은 환율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주머니에 든 돈이 10불짜리밖에 없기도 했다.

캐리어를 끌고 나가자 택시기사가 들러붙는다. 80,000루삐! 하면서.

속으론 50,000루삐면 10분 정도 걸리는 숙소에 갈 수 있다고 가이드북에 나와 있던데 했지만

이 꼭두새벽에 운전기사와 씨름하는게 귀찮아 그래 80,000루삐, (우리돈으로 8,000원 정도) 하곤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그와 새벽 거리를 달리면서 나는 미리 그에게 택시비를 지불하려고 루삐를 꺼내 손에 들고 있었더니

이 친구가 흘끔 내 손을 쳐다보더니 손을 내저으며 노! 노! 한다. 뭐라는거야? 맞잖아 8,000루삐!

10분후 호텔 앞에 차가 멈추니 새벽이니 리셉션은 아무도 없고, 경비원 2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택시에서 짐을 꺼내고는 기사에게 당당히(!) 8,000루삐를 건넸더니 이 친구 기겁을 하며 내게 노!를

연발하더니 경비원들에게 가서 뭐라고 호소(!)한다.

아니, 이 녀석 뭐라고 지네 사람들에게 얘기하는거야, 저 녀석 사기꾼 아냐?

경비원 한명이 내게 오더니 이 호텔을 예약했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택시비를 얼마에 흥정

했냐고 묻는다.  

8,000에 했다고 했더니 이 친구 빙그레 웃더니 내게 '80,000에 했겠지'한다.

그제서야 아이구! 80,000이지, 80,000이면 우리돈 8,000원인데 아무렴 우리돈 800원에 오기로

했을까 - 이런!

아이구 미안해! 하고는 그에게 80,000루삐를 건네곤 그를 돌려 보냈다.

그 친구 속으론 '멍청한 녀석!' 했겠지.

경비원에게 예약 바우쳐를 보여주고 방 키를 받으며 창피함이 뒤통수를......


상해 공항에서의 시간 착각과 함께 이 조그만 실수는 자책감에 빠지게 했다.

아! 이제는 내가 정말 늙었나보다! 

'0'이 하나 더 붙은 인도네시아 화폐를 뻔히 알면서도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고 전에 없이 허둥댄 것은

꼭 새벽에 남의 나라에 온 늙은이의 피곤함 탓만일까 하는.......

정신 바짝 차리자. 여기는 남의 나라이고, 나는 예전과 다른, 이상한 착각을 계속하는 늙은이야!


꾸따 비치는 생각보다 엄청 길다.

서핑을 배우는 이들이 많이 찾는거 같고 서핑보드가 모래사장에 도열해 있다.

꾸따는 전형적인 관광지의 형태다.

마치 네팔 포카라의 레이크 사이드와 비슷한 분위기지만 그보다는 훨씬 세련된 정도다.

오후엔 나가지 말고 수영장에서 수영이나 해야겠다.

5천원짜리 수영복을 하나 사고 내일 10시에 우붓 가는 택시(편도 30만루삐/ 우리돈 28,000원 정도)

를 예약해 두었다.

남의 나라에서 좀처럼 택시를 타지 않지만 여긴 택시 이외엔 마땅한 정기 교통편이 없다.

숙소에서 한숨자고 석양을 기대하고 꾸따 해변으로 -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역시 중국인이 압도적이다. 이제 세계 어딜가도 그들을 피할순 없다.

새삼 느끼는거지만 그들중 90%가 젊은이들인데 남자들은 하나같이 목이 굵고 뚱뚱하고 좀 못생긴

애들이고, 여자애들은 한국애들과 별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꾸따의 해변은 6시쯤이 되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참 아름답게 해변을 물들이고 꺼져갔다.

불타는듯한 노을은 아니었지만 모래사장이 길어 파도가 훑고 간 모래위로 반짝이는 노을의 잔상이

특히 아름답다.

해변을 거닐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 뛰노는 개들...... 꾸따는 낮보다 저녁이 훨씬 아름답다.

'발리의 해변을 혼자오는 남자는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번 내 여행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고 우붓이니까.

여기선 비행일정 때문에 이틀만 묵기로 한것이니(사실 이틀도 아니다. 만 하루가 맞다) 해변의 한심함은

어쩔수 없는 것이다.

몸은 빠르게 회복되는것 같다. 심리적 요인이라고 은근히 생각했지만 혹시 기온 탓이 아닌가 생각했다.

국내에서도 여름엔 컨디션이 좋고, 가을부터 영 좋질 않았으니......

사람의 몸과 사물, 그리고 우주는 하나로 묶여있고 통해 있어 이 통제할 길 없는 떠돔의 발작이 그렇게 

몸살을 앓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카를 구스타프 융의 '기억 꿈 사상'을 읽고자 짐에 넣었는데, 이 화려한 동네에서 저 책이 읽혀질런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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