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6)운농의 뉴질랜드 자동차 여행

운농 박중기 2013. 7. 27. 14:13

 

2011년 3월 10일 (테아나우 다운스-테아나우-퀸즈타운-에로타운-와나카)

 

어제는 한가지 배운게 있다.

'지치고 짜증나서 뭔가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뒤죽박죽 이더라도 절대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묵은 테아나우 다운스의 '피오르드 내쇼날 롯지'의 여주인의 눈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어제 우리는 밀포드 사운드를 둘러보고 다소 지쳐서는 망연히 있다가 문득 어제 예약한 숙소가 생각나서는 전화를 했던

것이다. 왜냐면 퀸즈타운에서 밀포드 사운드를 보고나서 좀 쉴 요량으로 '피오르드 내쇼날 롯지'에 2박을 예약했는데 현재

일정으로 봐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것 같아 1박만 마음먹고 숙소를 들어갔다.

주인은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의 인상 좋고 명민한 얼굴이었는데, 도착하니 숙소에는 우리말고는 아무도 없는듯 했다.

쉬고싶은 마음에 우리는 관광지에서 떨어진 숙소를 예약했던 것이다.

공동거실과 부엌은 썰렁하고 마당에는 주차된 차가 한 대도 없다.

안내대로 가서 작은 종을 두들겼으나 도무지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안내대를 살피니 조그만 메모지에 '방문객은 여기로

전화하세요' 라는 글귀가 씌여있다.

공동거실에 놓여있는 전화로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하니 곧 와서는 밝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만 '방 하나 주세요' 해 버렸다.

숙박계에 여권번호와 이름을 적으면서 나는 아내의 번호와 이름을 적어넣었다.

방값을 계산하면서 여주인은 나를 빤히 쳐다본다.

"한국에서 온 'Park' 아니세요?"

"아닌데요"

"당신 목소리가 그와 비슷한데......"

"......"

"당신은 어제 여기 전화해서 당초엔 2박을 하려고 했는데 1박만 하겠다고 했었지 않아요?"  

"......"

사실 나는 많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불쑥 튀어나온 '아닌데요'를 다시 주워 담기에는 뭔가 짜증스럽고, 또 엉터리 영어로

해명을 해야한다는 부담과 귀찮음이 나를 짓눌렀던 것 같다.

나는 숙박료를 지불하고는 키를 받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에게 가서는 차에서 짐을 꺼내 방으로 옮겼다.

그래, 참 내가 어제 전화를 하긴 했었지, 이틀동안 예약을 했지만 사정이 생겨 하루만 자겠노라고...... 그러면 왜 나는

쓸데없이 내가 아니라고 해버렸을까?

여주인의 눈은 '이 친구가 분명히 맞는데, 이 친구 목소리가 분명한데 왜 거짓말을 할까?' 하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짐을 정리하고 저녁을 해 먹으면서 그 얘길 아내에게 했더니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마구 나무란다. '왜 당신답지 않는 그런

행동을 해요? 좀 지쳤다고 당신을 부정하는 그런 행동을 하다니 참 어이없네요' 한다.

이거 영 찝찝하다. 하긴 나 자신 이런 따위의 행동을 했던 기억은 없다.

한참을 구시렁 거리다가 마침내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가서 사실대로 이실직고 할게"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렇지만 자존심 좀 구기지요?"

"이건 뭐, 자존심의 문제는 아닌것 같애, 내가 나를 아니라고 부정했다는게 말이 안되는 것 같어"

여주인을 다시 찿아 안내대로 가니 또 없다. 다시 전화해서 부르니 그녀는 그 온화한 미소를 띠며 왔다.

"미안합니다. 내가 한국에서 온 'Park'이 맞아요. 내가 거짓말을 했어요. 실은 내가 몹시 피곤해서요....."

이런, 구차하다. 피곤하면 거짓말을 하냐?

여주인은 아무 말없이 빙긋이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친다.

"땡큐! 당신 퍼팩트!"

뭐가 퍼팩트 하다는거지?  이 여인네는 완전히 나를 꿰뚫고 있었다는듯이 기분좋게 웃는다.

여인에게 멋지게 한 방 먹고 나 역시 멋적게 웃고는 아내에게 돌아와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잘 했어요!' 한다. 

아, 참 스타일 완전히 구긴 어젯 밤이었다.

 

퀸즈타운이 아쉬워 다시 들르기로 했다.

처음 당도했을때 그 이름처럼 화려했던 빛은 다소 식었지만 역시 아름다운 도시다.

우리는 멋진 퀸즈타운 가든에서 몇시간을 보내며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그럴 분위기를 충분히 안기는 멋진 공원이다.

수퍼에서 구입한 바나나, 요쿠르트, 빵과 과일들로 벤취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참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화려하고 멋진 경관속에서 이처럼 편하게 식사를 하다니..... 뉴질랜드는 역시 점심식사 시간이 너무 멋지단 말이야.

뉴질랜드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경관이 뛰어난 곳이거나 공원, 바닷가, 호숫가, 숲속 등등에는 탁자와  의자가 잘 배치

되어 있다. 음식을 펴기만 하면 훌륭한 레스토랑이 되는 것이다.

바닷가에는 바비큐 시설과 간단한 샤워시설, 발을 씻기 위한 시설...... 이 사람들의 정부는 시민들이 흡족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어떤것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듯 하다. 어찌보면 자질구레한 편의시설들을 어쩌면 저리도 곰살맞게

갖춰 두는지 그들의 소심함(!)에 탄복할 지경이다.

우리네는 어떤가? 수조(!)의 돈을 통 크게 털어넣어 거대한 보를 만들어 물을 가두고, 4대 강을 정비하고, 역시 거대한 댐 만들고,

참 통 크다.  여긴 참 통 작다. 그렇지만 이런 통 작은 나라에 나는 살고 싶다.

 

디어파크 라고 불리는 곳이 퀸즈타운의 동네 꼭대기에 있다는 가이드 북의 글을 보고는 찿아 올랐지만 폐쇄되었단다.

그렇지만 그 언덕에서 바라 본 퀸즈타운의 전경은 꼭 '반지의 제왕' 촬영지라는 디어파크 꼭대기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멋진 경관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층 건물이라고는 없고, 거의 90%가 1층 단독주택으로 되어 있고 3층 건물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호수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고, 그 호수 한쪽을 반도처럼 길쭉하게 차지하고 있는 지형과, 그 도시들의 뒤로는 거대한 산들의  위용이 마치 커튼처럼 감싸고 있다. 마치 상상력이 풍부한 화가가 나름대로 천상의 낙원을 그린 상상화 같다. 

우리는 그 고급스런 풍경속 공원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것 하나만으로도 여길 온 보람이 있군'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더니든(Dunedin) 행을 접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와나카의 YHA에 여장을 풀었다.

와나카는 퀸즈타운에서 북동쪽으로 48Km  떨어진 인구 4천명이 안되는 휴양도시다.

저녁을 지어먹고 호숫가를 둘이서 산책했다. 오후 5시 쯤에는 호숫가 잔디밭에서 깜짝시장이 열렸는데, 빵, 양고기, 채소, 잼,

과일 등 저녁 찬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파는, 순수한 주민들만을 위한 장이 선 것이다. 이 작은 깜짝시장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피아노까지 동원되어 즉흥 연주가 시작되었지만 곧 비가 찔끔거리는 바람에 작은 시장과 피아노는 철수해 버리고

말았다.

 

뉴질랜드에서 우리는 시종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딜가던 깨끗하고 차분한 분위기, 풍요롭고 환한 도심, 잘 정돈된 주택들과 친절한 사람들...... 물질의 풍요함과 사람들의 여유가 너무나 당연한 것 처럼 여겨지는 이곳이 내가 살고 있는 곳과는 너무나 이질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서울의 강남로와 아직도 추위에 떠는 달동네, 경찰의 곤봉에 짓이겨지는 노동자와 불타는 컨테이너...... 극과 극이 공존하는

우리네 삶과, 어느것 별반 차별 없을것 같은 이들의 풍요롭고 차분한 삶이 자꾸만 머릿속을 왔다갔다 한다.

남의 나라에 왔으면 잘 구경하다 가면 되지 무슨 시답잖은 감상에 빠지냐고 나를 꾸짖지만 좀처럼 이런 기분을 털어낼 수

없다.

아! 이제 이런 '잘 사는 나라'에는 오지 말아야지......

자꾸만 까닭모를 죄책감이 머릿속을 맴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 에서 이런 얘길 했다.

'일찍이 로마의 방위 기지 가운데 하나였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재미있는 상상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짐승가죽을 몸에 걸치고 화살을 손에 든 모습으로 강가에 서있는 남자를 뒤에서 묘사한 그림인데, 남자는 도나우 강 건너편 소풍을 즐기는 말쑥한 차림의 남녀에게 쏠려있습니다. 지금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뿐이지만, 먹을것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평화란 가진자에게만

최고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그림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먹을것이 없기 때문일까?

먹을것이 없다기 보다는 먹을것을 고루 나눠먹지 않는다는데에 문제가 있겠지.

이 나라는 그들끼리 얼마나 나눠 먹는진 몰라도 아마 우리처럼은 아니겠지. 적어도 우리처럼 극과 극의 모습은 어딜가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적어도 외양으로는......

참, 남의 나라에 와서 이 무슨 넋두리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