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뙤약볕에 나무베기 (편지)

운농 박중기 2017. 6. 5. 12:38

'겟 아웃', 재미있었습니다.

진하게 인종차별을 힐난했더군요.

어찌보면 '식스센스' 비슷한 반전이기도 했습니다만 그보다는 좀 덜했지요?

감독이 흑인이라니 그의 피해의식도 정당합니다. 


남원의 영화관에서 '원더우먼'을 봤습니다.

보다가 피식피식 웃으며 '참 뜬금없다' 했습니다.

좋은 비주얼과 촬영, 근사한 화면은 좋았는데 아무래도 우리 같은 중늙은이의 눈에는 무리였습니다.

중무장하고 한껏 멋을 부린 여주인공이 낙원을 벗어나 세계대전중인 전장터로 나아가 독일군을

쳐부수는 여전사로 활약한다는 설정 자체가 참 뜬금 없었습니다.

하긴 이런류의 영화가 뜬금없긴 매한가지입니다만 '원더우먼'은 그런 '뜬금없음'이 좀 더 심했습니다.


뜬금없는 얘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부엌에서 내다보면 크게 우거진 느티나무가 그 커다란 그늘로 주변 나무들을 고사 시키고, 이제는

건물위까지 함락할 지경이 되어 항상 걱정이 됐었습니다.

혹 태풍이 있을때 쓰러져 지붕을 건드리면 어쩌나하고 항상 불안했거든요. 

처음 이녀석을 심을땐 우리 강아지들의 집그늘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16년이 지나자

예상보다 훨씬 자라 버려서 감당이 안되는겁니다.

잘라내려니 이미 너무 커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리라고 보였습니다만, 뭐 도와줄 사람도 마땅찮아

며칠 전부터 이 녀석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고 올라가서 가지부터 쳐내리고 다음에 밑둥을 자르려고

계획했습니다.

경험에 의하면 나무란 밑에서 보면 별거 아닌거 같이 보여도 막상 잘라내서 가지가 땅에 내려오면

엄청난 크기라는걸 잘 압니다. 잔뜩 물을 머금어 무게도 엄청나고요.

하루를 꼬박 매달려 가지를 쳐내려서 매실나무 아래로 늘어 놓았더니 매실 밭 전체를 차지하네요.

굵은 가지를 전기톱으로 땔감용으로 자르고 잔가지는 한쪽으로 쌓고......

다음날은 큰 가지를 쳐내리고......

땀은 비오듯하고 어깨와 팔꿈치는 비명을 지르고.

마침내 내게 난도질을 당한 이 큰 나무는 커다란 그늘을 거두고 주변에 햇빛을 펼쳤습니다.

이틀에 걸친 숙원사업 느티나무 베기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좀 멀찌감치 떨어져 이 성과물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섬뜩한 한기를 느껴 움찔했습니다.

덩그러니 몸통만 남은 나무는 내게 '학살'을 당한 것입니다.

16년전에 마을 담벼락에 있던 내 키만한 나무를 양해를 얻고 뽑아다 심은, 이 집 역사와 같이 한

녀석을 이제는 거추장스럽다해 베어 버린겁니다. 

나무도 생명입니다.

돌이켜보면 이주해 이 곳에 살면서 무수히 많은 나무를 학살했습니다. 

땔감이다, 잘못 심었다, 걸리적거린다 해서 말입니다.

이주한지 몇년동안은 집안에 벌레가 들어오면 파리채로 쳐서 쓰레기통에 버리다가, 10여년 전부터는

아주 성가시지만 포획(?)해서 창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생명을 쉽게 죽인다는데에 괜한 찝찝함을 느끼기 시작했던게지요.

집 주변에 가끔 출몰하는 독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엔 보이는대로 나뭇가지로 때려 죽이다가

10여년 전부터는 집게로 잡아서 계곡 아래로 보내곤 했습니다.

이제 나무도 베고나면 학살로 여겨지니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된것 아닐까요?......


생명이 생명을 먹고사는 세상에서, 그런 방식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세상에 살면서 참 뜬금없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유기물이 무기질을 먹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걸 알면서 사치스런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겁니다.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학살당한 나무의 아픔처럼 내 몸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날씨가 더워집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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