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아시시)
마지막 일정으로 아시시를 선택한건 잘 한 일이다.
여긴 도시 전체가 산 위에 있어(산이라고 하긴 좀 무리인가? 높은 언덕이라고 해야할까? 그렇지만 아시시의
신 시가지에서 보면 아시시의 구 시가지는 산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과 동떨어진 천상위의 도시 같다.
그렇다. 아시시는 천상의 도시처럼 근사하고 예쁘고, 경건하고 정갈하다.
여행의 막바지, 몸과 마음을 추스러기엔 안성맞춤의 도시다.
시에나와 비슷하게 건물도, 길도, 성당도 모두 돌이다.
지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건물 같이 잘 보존된 집도 건축년한 표지석에 '1782' 라고 새겨져 있다. 230년이나
지났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견고하며 아름답다.
물론 1,700년대 건물보다 훨씬 오래된 건물들도 즐비하지만 모두 멀쩡하다.
현대에 와서 보수한 집도 물론 있겠지만 대체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거의 모두.
우리네 건물 년한은 한 30년 되나?
조그마한 길 부터 큰 길까지 포석을 깔고 계단을 만들고, 담벼락을 쌓은것을 보면 마치 장인들이 한 뼘씩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 같이 보인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개인주의가 극도로 치닫고, 실용성을 중시하며 경제성을 따지고, 나름 개성 어쩌고 하는 현대에 이런 통일된
아름다움을 만들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란걸 잘 알지만, 이곳은 현대의 모든 구조물을 아주 초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다.
국가와 종교의 힘이 막강하고, 군주나 교황이 마음만 먹는다면 전체주의적 통치가 가능해, 이런 일관성 있는
공사가 가능한 시절에 이런 아름다움이 이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장인정신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
게다가 멋스러운 등(燈), 화분, 창문을 수놓은 아름다운 자수, 견고하지만 아름다운 문(門), 담벼락에 걸쳐진
무쇠 장식등은 석조 건축물들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도시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장식한 이들의 미적 감각은 정말 대단하다. 우리네와 비교하면 너무나 부러운 부분이다.
더구나 어느 한 구역, 어느 한 부분만 그렇다는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시시는 도시 전체가 성당이나 예배당 같다. 완벽히 아름다운 도시에 종교적 경건함이 짙게 배여있다.
많은 성당과 집들을 장식한 성모상과 십자가, 또 기념품 상점에는 모두 종교관련 상품들이다.
아시시에서 탄생한 성 프란체스코를 기념하는 이 도시 최대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은 그 규모와 아름다움, 그리고
깔끔한 관리가 돋보인다. 어찌보면 결벽증 있는 관리인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지나치게 깨끗한 성당은 마치 지은지
얼마되지 않은 신축 건물 같다.
온통 기독교의 기운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경건한 기운이 감돌아 이 도시에 들어서면 왠지 정숙해야 할 것 같고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같은 분위기다.
여지껏 어느 곳에서도 아시시 처럼 완벽한 정갈함, 정숙함, 경건함이 있는 도시는 보지 못했다.
오후에는 로컬 버스를 타고 아래 아시시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라 성당도 가 볼겸 로마행 기차표를 예매하러
내려갔다. 아래 아시시 까진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역내의 시간표를 보고는 내일 오후 4시 19분 표를 달랬더니 역무원이 바로 옆에 놓인 표를 주길래 찬찬히 살펴보니
날짜가 오늘이다. 내일 표를 달랬는데 왜 오늘 표를 줘? 하니 '에니 데이, 에니 타임!'이란다. 티켓은 5월 14일까지
유효한, 그러니까 두 달 동안 아무때나 이용할 수 있는 표라는 게다.
여기선 기차를 승차하면서 역내에 있는 기계에 표를 밀어넣어 체크하게 되어 있는데, 한번 사용한 표를 다시 사용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체크를 하지 않고 기차를 탔다가 검표원에게 적발되면 한번 더 타려는 흑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무거운 벌금을 매긴다고 한다.
말하자면 기계에 넣어 체크를 해야하는 표이므로 2개월간 '아무 날이나 아무 시간에나' 표인 것이다.
내일 로마에 6시 전후해서 도착하면 처음 숙박했던 로마 둥지민박 아줌마네에 저녁식사 시간전에 도착할 것이다.
아래 아시시에서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라 성당을 보고 다시 올라와 골목길을 헤매다 작은 갤러리가 있기에 들어가
보니 안이 상당히 넓은 개인 화랑겸 작업실이다. 내가 들어서자 몹시 반가운듯 반색을 하며 화가가 손을 내밀었다.
유화와 수채화가 가득하다. 이곳 아시시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 많다. 아시시는 그림을 그리기엔 최적의 장소다.
한참을 구경하다 작은 유화 한 점을 샀다.
그는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고는 액자 뒷면에 사인과 날짜를 넣어준다.
한국인에게 그림을 팔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러시아 뻬쩨르부르크 여행때도 거리 화가의 그림을 한 점 샀었다. 왠지 거리의 화가나 그림쟁이들을 보면 그들의
그림을 사고 싶어진다. 동료의식(!) 때문일까?
저녁으로 까페에 들어가 햄을 끼운 빵과 카페라떼로 떼우는데 짜서 도저히 먹기가 어려워 남기고 말았다.
이탈리아에서는 햄, 올리브 등이 들어 간 음식은 굉장히 짜서 곤혹스럽다. 그래서 치즈가 든 빵을 달라고 했는데
못 알아 듣고 햄이 들어 간 빵을 집어 오븐기에 데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먹고 말았다.
그런데 숙소에 돌아와 보니 방문 앞에 A4 용지에 커다랗게 영어로 메모를 해서 테이프로 붙혀 놓았다.
이게 뭐야?...... 찬찬히 보니 이 숙소 매니저가 자기 휴대폰이나 호텔 전화 번호로 '자기와 컨텍'을 하자는 거다.
왜? 내가 뭔가 실수한게 있나? 다른 방에는 붙어있는 것이 없는데 왜 내 방에만 커다랗게 붙혀 놓은걸까? 찜찜하다.
그 친구 휴대폰으로 전화해서 '니 메세지가 뭐냐?'고 하니 '내일 몇 시에 떠날거냐?'고 묻는다.
'오전 10시쯤 체크아웃 할거다'고 하니 '오케이, 노 프로블럼!' 한다.
아니, 이 친구 그거 물어 보려고 비싼 전화비 들여 전화하랬나? 은근히 부화가 나면서도 별 일 아닌것에 안심이
되긴 했다. 실내의 전화기로 0번을 눌렀지만 통화가 안되는 것으로 보아 이 친구는 숙소에 없고, 딴 곳에서 전화를
받는 것 같다. 비수기엔 이런 식으로 영업을 하는 것 같다.
바깥 출입문과 내 방의 열쇄를 주면서 '네 알아서 열고, 잠그고 다녀라' 하고선 리셉션은 아침 식사 제공 후에는
걸어 잠그고 제 집이든 어디든 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낮에 리셉션이 있는 문을 열었으나 잠겨 있었던 것이다.
내일 아침 내가 일찍 떠나면 빨리 정리하고 자기네 볼 일 보려고, 그 계산 하느라 내게 '자기와 컨텍' 어쩌고 하는
문구를 떡하니 방문앞에 붙혀서 겁을 먹게 한 것이다.
더구나 지가 내게 전화하지 않고, 내가 전화를 걸게 하다니...... 아시시 분위기와 안 맞는 녀석!
이탈리아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내일 로마로 2시간여 달려 테르미니 역에 내려 마지막 밤을 보내면 모레는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 한다.
아침에 체크아웃 하고 짐을 맡긴후 오후 늦게까지 아시시를 흠뻑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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