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2) 로마를 찾아서

운농 박중기 2016. 4. 6. 14:40

3월 12일 (피렌체 - 시에나)


피렌체에서 시에나로 가는 버스 길은 짧았다. 계속 이어지는 마을들을 거쳐 1시간 20분 정도.

시골길은 아직 본격적인 농사철이 아닌데도 밭은 잘 갈려있고, 과수의 가지치기도 끝난 듯 하다.


시에나에 들어서자, 아! 내가 이탈리아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지! 하는 느낌이다.

버스 정류장은 조그마하고, 벤치에는 노인들이 모여 앉아 소근거리며, 아이들은 벽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다. 잿빛이 섞인 옅은 갈색의 지붕들이 고색창연하고, 거리는 한산해 이탈리아에서 익숙했던

여행객들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여행이나 관광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듯한 도시 모습이다. 그저 전부터 그래왔던 것 처럼

사람들은 평화로운 얼굴이고 노인들은 깨끗한 옷차림이다. 호텔을 찾아 내려서는 거리 끝에는 성당이

서 있다. 꼭 번잡한 관광지를 비로소 벗어난 듯한 쾌적함이 밀려온다.


예약한 호텔의 바우쳐에 있는 주소와 약도를 보며 정거장에서 200미터 가량 내려와서 지나가는 중년

부인에게 호텔명을 대며 위치를 물었더니 '여기잖아요!' 하는 표정이다. 호텔 옆에서 물었던 것이다.

우리네 처럼 요란한 간판이 없는 유럽에서는 흔히 겪는 일이다.

이탈리아의 호텔들은 대형 호텔 이외에는 큰 간판 따위나 표지판을 전혀 설치하지 않고, 조그만 노트북 

만한 곳에 호텔 이름을 예쁘게 각인한 정도로 표시하니, 바로 인근에 가도 발견하기가 어렵다. 러시아

에서도 그랬지만.

우리네는? 입간판에다 벽면, 정면에 요란하게 설치해 놓고, 건물 윗쪽 벽에도 의례 설치해 놓은것은

물론, 밤중에도 행여나 보이지 않을까 네온까지 밝혀두니 이 '친절'에 익숙한 눈에는 이런 이탈리아의

'불친절'에 당황할 수밖에...... 그렇지만 나는 이런 '불친절'이 훨씬 좋다.  

이런 유럽식의 업소 표기는 이들의 미적 감각에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도로명 주소를 시행해 온 이유가

클 듯하다. 우리네도 이제 도로명 주소를 시행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도로만 찾으면 주소를

확인하는 것은 쉬우니 그런 '친절'은 없어지려나?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치우사렐리' 호텔은 버스 정류장에서 멀지 않아 좋았고, 우리 돈 7만8천원 정도인데 갸격대비 훌륭하다.

아마 이 정도의 숙소는 성수기가 되면 두세배는 더 뛸 것 같다.

짐을 풀고 인근의 산 도메니코(Basilica di san Domenico) 성당에 들어갔다.

심플한 내외관의 성당은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옛것이 아닌듯 했다. 전체적인 도안은 성화(聖畵)를

모티브로 했지만 추상화 형식으로 도안되어 굉장히 특이하고 아름다운데다 색감이 여태껏 보아 온

성당들과 완전히 달라서 내 눈엔 굉장히 아름답게 보였다. 아마 스테인드 글라스만 별로도 최근에 제작,

설치한 것 같다.

벽면에는 성녀 카테리나의 유해(얼굴 부분 해골만)가 안치되어 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결한 건물이지만 마치 교과서적 전형의 깔끔한 이미지의 성당이다.

산 도메니코 성당을 나와 마을 길을 걸으니 이건 뭐, 완전히 중세시대에 들어선 듯 하다.

로마는 시가지 안에 유적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베네치아는 물의 도시라 특이한 풍경을 보여주었고, 

피렌체는 유적들 사이의 세련된 도시로 보였다면, 시에나는 도시 전체가 완벽한 중세시대 모습 그대로

였다. 역시 시에나를 선택한건 잘한 일이었다. 이런 풍경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좀 피곤해서 오후에는 호텔에서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쉬려고 작정했었지만 시에나의 도시 일단을 보고

나니 절로 캄포광장으로 발길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강렬한 이끌림으로......

시에나의 중심에 있는 캄포광장은 여태것 보아 온 여느 광장보다 단연 최고다.

부채꼴 모양으로 경사지게 펼쳐진 광장의 전경은 주변의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멋지게 어울린다.

여름에는 여기서 '팔리오 축제'가 열린다고 하는데, 안장이 없는 말에 앉아 팔리오(자신이 속한 콘크라데

의 깃발)을 들고 광장을 돌진하며 펼치는 경주는 이미 이탈리아에서도 너무나  유명하여,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관람객이 몰려 든다고 한다. 화려한 중세 복장을 한  기수들이 중세 의식을 재현

하면서 행렬을 펼치는 모습이 굉장하단다.

이 축제를 보기 위해서는 최소한 4개월전에는 숙소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데, 아마 지금쯤은  예약이 마감

되었을터이다.

시에나의 전통있는 17개 콘크라데의 기수들이 등장하는 여름의 캄포광장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 이 광장은

벌써부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는듯 하다.

멋진 캄포광장을 내일도 와 보겠지만 자리를 뜨기가 아쉬워 부채꼴 모양의 중심에 자리한 찻집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켜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시에나를 떠나기 전에 두어번은 더 올 것 같다.

시에나의 골목길들 역시 중세의 모습 그대로인데, 마치 골목에서 중세의 옷자락을 끌고 우아한 여인네가

부채를 펼치며 나타날 것 같다.

경사가 많은 구릉지에 위치한 시에나의 지형 때문에 골목길들은 심한 경사를 이룬곳이 많은데 이런 풍경이

더욱 멋지게 어울린다. 아래쪽으로 쭉 뻗은 포도길(잔돌을 박아 만든 길)과 주변의 집들이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 더없이 좋은 비율의 전경이 연출된다.

만약 이탈리아에 살아야 한다면 주저없이 시에나를 선택할 것 같다.

다른 도시와 다른 점이 또 있다. 시 당국의 정책인지 이곳만의 룰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점들(식당, 카페,

레스토랑, 수퍼마켓, 기념품 상점 등등)이 문밖으로 물건이나 돌출 간판을 일체 내놓지 않아 거리나 골목길은

가까이에서 보지 않으면 가게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정도여서 거리는 더욱 중세시대 처럼 보인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둘러 볼 시에나가 기대된다.

저녁은 피자가게에서 산 조각피자 한 쪽과 감자튀김 한 봉지, 맥주 한 캔으로 호텔안에서 떼웠다.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나니 한결 찌뿌드하던 몸이 회복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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