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을 망설이다 러시아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까다로운 러시아의 외국인 거주지 등록, 비자발급, 악명 높은 러시아 국적기...... 그렇지만 그건 벌써 몇 년전 해결된 일들임을 몰랐던
나의 무식이었음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거주지 등록은 호텔에 가면 약간의 수수료를 받고 대행해 주고, 비자는 작년에 한국과의 협정으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해져 있었고,
러시아 국적기는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고 하지만 맘에 들지 않으면 한국 국적기도 수시로 다니니 그걸 타면 될테고......
말하자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티켓을 예매하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10대 후반부터 빠져 있었던 도스또옙스키와 파스테르나크의 나라에 가자!......
도스또옙스키는 내 생애 전반을 지배했습니다.
라스꼴리니코프가 내 속에 있었고, 스비드리가일로프 또한 공존했으며, 지바고가 내 속 어느 방에 자리하고 있었고, 라라는 내 생애
전반의 여인 모델이었지요.
까라마조프의 알료사와 이반이 내게 뒤섞여 있었고, '대심문관'의 장(章)은 평생 내게 종교학을 한사코 디밀었습니다.
그렇게 러시아의 작가들은 내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언젠가 라스꼴리니코프가 번민하던 네바강 가에 서서 타는 노을을 보리라......, 그가 대지에 키스했던 센나야 광장을 반나절은 서성거릴테다!......
뻬쩨르부르그의 뒷골목 어딘가에서 마르멜라도프와 비슷한 주정뱅이 인간을 선술집에서 찿아보리라......
그리고 모스크바에서는 파스테르나크가 집필한 집을 찿아가리라......
닥터 지바고는 곧 나였고, 또 전혀 아니기도 했으며, 오히려 빠쌰가 나와 비슷할거라는 등등......
참 러시아는 내게 특별한 땅 입니다.
9월초 그 땅에 갑니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과, 결코 웃는 일이 없다는 그들의 땅에 갑니다.
센나야 광장은 소냐에게 떠밀려 대지에 키스하던 라스꼴리니코프의 시대와 비슷 하기는 할까요?
네바강은 음울한 라스꼴리니코프가 바라본 것 같이 영혼없이 흐를까요?
넵스키 거리는 외투에 두 손을 꽂은채 음울한 시선을 불태우며 걷는 라스꼴리니코프로 가득할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을겁니다.
여행객들로 넘쳐나는 도시겠지요.
마르파 할매가 운영하던 고리대금 전당포는 희황한 네온으로 덮혀 있을테지요.
결국 나의 여행은 그 도시를 헤매며 그것들을 떠올리는, 세월을 거스러는 여행이 되기 딱 좋을 듯 합니다.
그렇지만 그곳을 가고 싶습니다.
50년 가까이 '언젠가는 갈테야' 하는 곳을 말입니다.
파스테르나크의 집필실은 내가 상상하는 그의 희미하면서도 강렬한 감성을 떠올리게 할까요?
그의 집필실에서 나는 라라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요?
여행을 시작하기 한 달전부터 이런 상념이 들기는 처음입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는 나에게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 차라리 오지 않을걸 그랬어!' 하고 땅을 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곳에 가야합니다.
47년 동안 나는 그곳에 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 가기 전 '적어도 러시아 글을 뜻은 몰라도 읽을 줄은 알아야지!' 하고는 펼쳐든 러시아 알파비트! 도무지 이렇게 헷갈리는
문자가 있는줄 몰랐습니다. 몇일 씨름하다가 포기해 버렸습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 역명을 읽지 못해 엉뚱한 곳에서 헤매도 뭐, 어떻습니까? 라스꼴리니코프는 넵스키 거리를
열에 들떠서 하루종일 헤매지 않았습니까.
나도 그 흉내를 내면 될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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