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역사의 복수.이제훈(한겨례 칼럼. 2013.8.15)

운농 박중기 2013. 8. 15. 10:58

 

 

오늘, 2013년 8월 15일 한겨례에 실린 이제훈씨의 칼럼이다.

한겨례는 이러한 글을 싣는다. 그래서 나는 한겨례를 읽는다.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 앞.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섰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6000여명이 참살당한 일을 기리는 탑이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섰다.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긴 일부 기자들도 따라 몸을 뺐다. 그때, 브란트가 기념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듯이 터졌다. 브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브란트는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것이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요제프 키란티예비츠 폴란드 수상은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브란트는 훗날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독일의 가장 치욕스런 역사를 증거하는 곳에서,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독일인에 대한 폴란드인의 감정은,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폴란드인은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사죄와 용서와 화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일본엔 브란트 같은 지도자가 없었다. A급 전범 용의자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를 존경한다는 아베 총리는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며 평화헌법 무력화에 여념이 없다.

 

 

1944년 8월25일 프랑스가 4년 2개월간의 나치 점령에서 벗어나자, 임시정부 주석인 샤를 드골은 나치 부역자를 발본색원했다. 6763명이 사형 선고(767명 처형)를, 4만여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나치 부역 언론(인)이 특히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694종의 신문·잡지가 폐간·몰수됐고, 잡지 <오토>의 사주인 알베르 르쥔 등 여러 언론인이 처형됐다. 드골은 말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더라도, 또다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을 없을 것이다.”

 

 

한국엔 드골이 없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시켰고, 김구 선생은 해방된 조국의 분단을 막으려다 살해됐다. 광복 68년째인 2013년, 한국 정부는 항일투사들을 사냥한 간도특설대의 백선엽을 기리는 상을 제정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수석 졸업자인 다카키 마사오 또는 오카모토 미노루(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의 ‘유훈’을 실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과거에 눈을 감은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 된다.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가 과거를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옛 서독 대통령의 당부를 무시하는 건 아베의 일본만이 아니다. 역사의 복수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