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일 (풀바리, 그리고 색(色)의 축제 홀리)
이른 아침, 잠이 깨어 기지개를 켜는 포카라 시내를 한바퀴.
역시 날씨는 청명하고 공기는 맑고 쾌적하다. 게다가 네팔의 새란 새는 포카라에 다 모여든 듯 하다. 꽃은 집집마다 자태를 뽐내며 활짝, 그리고 무성하게 피었고, 나무 전체를 붉고 혹은 노랗게 뒤덮은 것도 있다.
적어도 포카라는 네팔에서 축복받은 땅인 것 같다. 예전 어릴적 '코발트색'이라 부르던 하늘을 여기서 본다. 흰(정말 새하얀) 구름은 축제날 소담스런 솜사탕 과자처럼 한껏 부풀어 있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평화스럽다.
"나마스떼!"
"나마스떼!"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한국에서."
"네팔에는 몇 번째예요?"
"두 번째요."
"네팔 어때요?"
"좋아요. 당신네 나라는 정말 아름다워요."
"고마워요. 좋은 날들 되세요."
"나마스떼!"
"나마스떼!"
우리네는 이런 인사말에 참 인색한데......
스물다섯이나 됐을까? 알밤같이(우리 어머니께서 잘 쓰시는 표현대로) 잘 생기고 똑똑하게 생긴 청년이 곁을 스쳐지나가며 인사한다. 포카라는 밝다. 그리고 맑다. 동네의 곳곳에 꽃이 넘쳐나고 뒤켠에 심어놓은 채소들이 싱싱하다. 아이들은 예쁘고, 카트만두와는 달리 깔끔하다.
기분 좋게 한 시간쯤 산책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오늘 우리는, 호수에서 흘러온 강물이 대지로 빨려들었다가 암벽의 큰 구멍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비경을 볼 수 있다는 근교의 뻐탈레 차고(Patale Chhango)와, 강물로 인해 침식된 종유동굴이 이어져 있다는 곱테숴러 머하데브 동굴(Gupteshwor Mahadev Cave), 그리고 타실링 티베트 난민촌(Tashiling Tibetan Refugee Camp)에 가기로 작정하고 나섰다.
먼저 도착한 곳은 티베탄 난민촌이었는데 '난민촌'이라는 이름에 우리 생각으로는, 임시 주거지에 텐트치고 생활하는 어려운 이들을 연상했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고 군대막사처럼 일렬로 지어진 블록 집들이었는데, 카트만두 파턴 인근의 난민촌과 거의 유사한 정착촌이다. 가운데는 잘 지어진 큰 강당 같은 집회소도 있고,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학교, 불교사원도 나름대로 번듯하다.
우선 우리는 그들과 가까이 해 볼 요량으로 유명한 그들의 수제품 전시 판매장을 찾았으나, 굳게 잠긴 채 주위에 정적만이 감돌아 마을로 들어갔지만 역시 정적, 골목길도 정적......
이상하다 싶어 큰길로 나오니 사원 마당에 티베탄들이 모두 모여 있다. 어? 왜 이러지? 오늘이 이들의 무슨 날인가? 들여다보니 마당에는 우리네와 흡사한 얼굴과 표정의 사람들이 300-400명 앉아, 더러는 마니차를 돌리고 더러는 귓속말로 얘기하며, 연단의 승려가 마이크로 연설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연단에는 익숙하게 보아 온 달라이 라마의 큰 사진이 걸려 있고, 어린 승려 네 명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승려의 장시간에 걸친 훈시(?)가 이어지고, 그들의 세계에선 유력인사인 듯한 이들이 속속 도착하고, 출입구에서 대기하던 이들은 황급히 이들을 영접하며 앞자리에 앉도록 권유하고, 권유받은 이들은 한결같이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군중의 중앙을 통과해 앞자리로 향한다.
어쩌면 우리네 행사장과 이렇게 똑 같을까? 어쨋든 이 날은 부디스트(특히 티베탄들의)들의 무슨 기념일인 것 같다. 워낙 진지한 모임 같아 카메라 셔터를 누를 엄두도 못내고 뒤 열에서 서있는데, 갑자기 소란스럽더니 관광객을 실은 미니버스 세 대가 들이닥쳐 60-70대 노인들이 우르르 내린다.
이들은 한결같이 캠코더, 소형 카메라를 들었는데, 내리자마자 행사장 뒤로 몰려가 촬영을 해댄다.
생김으로 봐선 일본인 같기도 하고, 중국인 같기도 한데 한국인은 분명 아니다. 중국인은 아닐텐데?...... 그들은 여기에 관광을 오기엔 캥기는 것 아닌가?
그들 중 인솔자로 보이는 젊은 사람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중국인이냐?"
"아니다. 우리는 대만에서 왔다." (중국이나 대만이나......)
하지만 대만은 입장이 좀 다르겠지? 하긴 대만인들은 티베탄들에게 정치적 가해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촬영 태도들이나, 삼삼오오 기념촬영 장면은 엄숙한 분위기의 집회 장소에서 그리 썩 유쾌해 보이진 않는다.
우리는 그곳을 조용히 빠져나와 굽테숴러 머하데브 동굴로 향했다. '향했다'고 했지만 바로 그 동네다.
동굴로 들어가서 '시바' 신상(神像)만 보는데 25루삐,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 종유동굴까지 보려면 90루삐, 우리는 90루삐를 내고 들어갔다.
한 수행자가 이 동굴에 시바 신의 동상이 잠들어 있는 꿈을 꾸고 나서 내부를 조사해 보자 진짜 동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설명을 입구에 해 두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동굴입구로 들어가 계단 몇 개를 밟고 내려서니 이른바 시바 신상이 있다. 1미터 정도 크기의 시커먼 바위 한 개다. 그 바위 위에는 머리가 네 개 달린 코브라 형상을 시멘트로 만들어 놓았는데 끔찍하고 흉물스럽다. 솔직히......
그런데 이 바위를 빽빽한 철창으로 가려놓고 '사진은 찍지 말라'다. 음, 별로 찍고 싶지 않군!
우리는 더 아래로 내려갔다. 안내인이 랜턴을 들고 따라와서 설명을 하는데, 언젠가 스위스 여성이 밖에서 이 동굴로 떨어져서 죽었다나? 그래서 그 여인네의 이름을 따서 'Devis Fall' 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끝머리에서 보는 동굴은 밖의 밝은 빛이 스며들어오고, 폭포가 떨어졌는데 아주 색다른 풍경이다. 밖의 뻐탈레 차고의 빛이 동굴로 들어오는 것이다.
밖을 나와 뻐탈레 차고를 보니 과연 동굴로 바깥의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뻐탈레 차고 앞에서, 그쪽으로 운행하는 대중버스가 없어 택시를 타고 포카라의 외곽지역에 있는 그리운 '풀바리' 호텔로 향했다.
왜 '그리운'고 하니 2004년 10월 풀바리 호텔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겐 참으로 특별한 추억이기 때문이었다.
풀바리 호텔은 네팔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국제적인 특급호텔이다. 그런데 이 호텔은 네팔의 전통 양식으로 지어져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호텔 자체의 아름다움도 대단하지만 이 호텔이 위치한 지형이 그야말로 특이해서 호텔에 묵으려는 사람 보다도 이 특이한 경관을 보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을 듯한 호텔이다.
호텔의 옆으로는 어마어마한 깊이의 침하된 지반이 내려앉아 있고, 그 지반 아래를 흐르는 세티 건더키 강의 아련한 아름다움은 황홀하고, 지반 아래 넓게 조성된 밭들이 아름답게 얼룩을 만들고 있으며, 거대하게 갈라져 있는 지반 반대편으로 넓은 초지가 조성되어 있고, 꺼진 광대한 지반 아래에는 또 하나의 지하세계가 펼쳐져 있는 듯한 특이한 광경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넘어 경악스럽기 까지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풀바리 호텔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아침의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츠레, 그 설산들을 거대한 빙산으로 보이게 하는 흰 구름들......
그러나 2004년 10월과 지금 3월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3월 중순의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인 탓인지 침하된 지반은 너무 적나라하게 햇빛에 들어나 신비감이 반감했고, 아름다운 풀바리의 건물은 여전했으나 세티 건더키 강은 오랜 가뭄으로 코발트빛을 잃은 채 석회석 물빛이었으며, 오후의 구름에 묻혀 마차푸츠레와 안나푸르나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10월과 3월의 포카라가 완연히 다르다는 걸 왜 기억하질 않고 그때와 꼭 같은 풍경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그렇다. 10월에서 이듬해 2월 까지와 3월에서 9월 까지는 히말라야 조망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10월에서 2월까지, 그러니까 네팔의 건기(乾期)에는 히말라야 설산 조망을 비롯해 모든 시야가 맑아 뚜렷한 풍광을 잘 조망할 수 있지만 3월에서 9월 까지의 우기(雨期)에는 뚜렷한 조망을 할 수 있는 날이 거의 드물다. 어렵게 히말라야 여행을 계획 했다면 우기는 피해야 한다.
우리는 우기가 시작되는(건기가 끝나는) 시기에 있어 그나마 기대를 했던 것인데 '역시'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최대한 검소'라는 나름의 금기를 깨고 풀바리의 레스토랑에서 우리 형편에 과도한 점심을 먹고, 택시가 한 대도 들어오지 않아 땡볕이 내리쬐는 길을 한 시간동안 걸어 동네 어귀로 나와 겨우 버스를 탔다.
그런데 버스가 시내로 들어서자, 시내 전역은 붉은 물감을 끼얹은 젊은이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사방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괴성을 지르고, 골목에서 튀어 나오고, 주택과 상가의 옥상에서 붉은 물감이 든 물총을 쏴댄다. 아니, 이게 뭐야! 어른들이 물총 장난이나 하잖아!
그런데 이게 예사로운 장난이 아니다. 아하! 이게 언젠가 TV에서 봤던(인도였던 것 같은데) 그 축제로구나! 홀리(Holi, 색의 페스티벌). 길거리 골목 몇 군데에 '무슨 페스티벌' 어쩌고 하는 현수막을 여러 곳 본적이 있는데 오늘이 그날인 것이다.
거리는 얼굴과 머리통, 옷에 붉고 노란 그리고 새파란 칠을 한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미니 버스를 타고 괴성을 지르며 내달리고, 버스의 지붕위에서도 괴성, 주택 지붕에서도 괴성과 물총 세례. 그리고 아우성. 한마디로 난리 났다.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에도 누군가 물감을 푼 물을 뿌리고 지나갔지만 다행히 창문이 닫혀있어 화(?)를 면했다. 그러나 화를 즐거이 자청한 사람들이 훨씬 많아, 몰골들이 '멜 깁슨'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전사(戰士)들이다.
우리가 탄 미니버스의 운전기사는 스무 살 정도의 청년인데 사이클 선수 헬멧처럼 생긴 모직모자에다 반사유리의 선글라스, 미군 하사 계급장을 팔에 떡 붙힌 '럭키 가이'다. 그는 핸들을 한 손으로 잡고 디스크 자키의 레코드판 돌리기 보다 더 재빠르고 정교하게 되감고, 튕기고, 돌리며 신나게 운전하면서 수시로 시선은 거리의 또래에게로 향한다. '햐! 끝내 주는데! 오늘 내가 쉬어야 했는데 말야!' 이러고 있다.
이 혼잡이 극에 이른 거리에서 이 청년은 그야말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운전 테크닉을 구사한다. 운전솜씨만을 놓고 볼 때는...... 음! 이 자는 거의 '도사님' 수준이다.
이렇게 난리법석의 거리에서, 신기의 운전 테크닉을 음미하며 겨우 레이크 사이드에 들어서니 어렵쇼? 외국인들까지 얼굴에, 옷에 예의 그 칠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동양인은 칠한 이가 없고, 전부 서양인들) 음...... 이 자들도 전염되어 있군!
우리는 늦은 저녁을 한국인 식당 '뚝배기'에서 챙겨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마니차》 티베트 불교의 법구(法具)로서 불경을 적어 넣은 종이가 안에 들어 있어서 한바퀴 돌리면 불경을 한번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는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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