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25 (빠당바이 - 발리 공항)
어젯밤은 몹씨 몸상태가 저조했다.
아하, 이거 재미없는걸, 내일 이렇게 해서야 아침에 온전히 일어나겠어? 했는데 10시간 정도를
자고나니 좀 나아졌다.
어제는 스노클링을 한답시고 허우적댔고, 밤에는 신혼부부 전, 이 부부와 블루라곤 뒷편 에코
빌리지의 레스토랑에서 아궁산을 보며 맥주를마시고 한참을 걸은터라 몹씨 피곤했던게다.
바다 건너 보이는 (만(灣)이 우리 앞에 있었으므로) 아궁산은 3천미터가 넘는 위용을 자랑하며
웅장했다.
꼭대기에는 흰 스모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로 출발할 때 뉴스에서 아궁산의 분화가 임박한게 아니냐, 곧 대폭발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무시했었는데 분화구에서 피어오르는 스모그를 보니 얘기가 달라
진다.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은 한쪽 테이블에 아궁산 분화구를 향한 망원경을 거치해 두고 수시로
들여다 보곤 했다.
그들로서는 아궁산이 분화를 일으키면 당장 문제가 심각해지겠고, 더구나 눈 앞에 바로 스모그가
피어 오르는 분화구가 보이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겠다.
오후 5시 셔틀버스 티켓을 어제 미리 예매해 두었으므로 숙소에서 12시에 체크아웃후 짐을
맡기고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후 계속 머물렀다.
몸상태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돌아 갈 체력도 비축할겸.
길거리 좌판에서 셔틀버스 표를 판 녀석이 또 내게 매춘을 권하며 히죽거린다.
불쾌하기도 하고, 전에 이곳을 스쳐간 한국인들의 행태가 괜히 의심되기도 해서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는 게의치 않고 장난스레 히죽댄다.
5시 전까지 좌판 있는 곳으로 오면 된다고 했었지만 5시가 넘어도 셔틀버스는 오지 않는다.
30분이 경과해도 오지 않아 녀석에게 항의하니, 별 일 아니라는듯 무조건 기다리란다.
그리고선 내게 비행기 출발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 하지만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좀 있다 택시기사가 오더니 녀석과 수근거리면서 나를 힐큼거린다.
보아하니 나를 지치게 한 뒤 택시를 타게 하려는 수작이다.
셔틀버스는 7만루삐, 택시는 35만루삐. 5배 가격에 셔틀버스는 2시간 30분이 걸리고, 택시는
1시간이 걸린단다. (나중에 보니 셔틀버스도 1시간 10분이 걸렸다)
내 비행시간을 자꾸 묻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예 책을 꺼내 읽기로 했다. 관심을 꺼버리니 그때서야 한 녀석이 나타나 자길 따라오란다.
가니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17:00시라고 적어 둔 시간표는 낚시용.
발리에 들어와서는 버스를 본 적이 없다. 우리네 대형 버스는 전혀 없었고, 미니버스도 여간
해선 본적이 없었다.
노선버스가 꾸다에선 본 적이 한번 있었다.
말하자면 발리에서는 공항근처의 꾸따에만 노선버스가 몇 대 있고, 우붓이나 이런 작은 동네는
아예 노선버스는 없다고 생각하면 맞다.
여행객들은 거의 택시를 이용해서 이동한다(이 택시도 꾸따 이외에는 공식적으로 표기된
택시는 없고, 모두 개인이 모는 사설 택시로, 흥정을 해야 한다)
빠당바이의 길가에 숱하게 적어 둔 셔틀버스 시간표는 공식적인 노선버스가 아니라 모두 사설
미니버스의 낚시용 시간표라고 보면 정확하다.
5시 출발 예매표를 가지고 6시쯤 버스를 탔지만 출발하지 않다가 30분쯤 더 지나 승객으로
좌석이 다 메워지자 출발했다.
비행기 탑승시간을 감안해 시간에 맞춰 버스를 타려고 시도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비행기라 전혀 서둘 필요가 없는지라 그들의 전횡을 무시하고 여유를 부릴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스트레스 수치가......
인도에서의 경우이래 여기가 처음이다.
알고보니 공항가는 길에 있는 사누르나 덴파사르, 꾸따 등을 들리면서 운행하는게 아니고, 사누르
행 승객만 태우고 출발하고, 덴파사르 행 승객만, 공항 행 승객만 태우고 직행하는 식이다.
시간표에 있는 2시간 30분이 아니라 1시간 10분만에 공항에 도착했다.
발리공항은 근사했다.
여태까지 본 공항중 작지만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올땐 새벽에 도착해 공항을 빠져나오기 바빠서 공항내부를 둘러 볼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부터
6시간 넘게 공항에서 죽치고 있어야 하니 여유가 있을밖에......
안내 데스크에 문의하니 내가 타야 할 중국 동방항공은 체크인이 22:30분 부터라고 한다.
체크인 까지는 3시간 가까이 기다리다가 출국장을 통과해서 또 3시간 가까이......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6시간을 날아 상해로 가서 6시간 40분을 기다렸다가 김해공항으로......
싼 비행기 표의 대가다.
하지만 50만원 정도의 차이면 백수인 입장에선 돈버는 일이다.
중국 시안 행 체크인 하는 창구가 오픈되자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앞다퉈 줄을 서기 시작하고
순식간에 창구앞은 왁자지껄 시장바닥이 되고 만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데도 엄청난 소음은 도무지 견디기 힘들다.
옆에 앉아있던 백인 커플이 나를 보며 어느나라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하자 '저 중국인들!
정말 돌아버리겠어!' 한다.
한국인들도 저런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단체 관광객들은 여전한 경우도 있다.
저들도 세월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렇지만 도저히 앉아서 베길수가 없어 자리를 옮겼다.
출국장을 빠져나와 혹시 하는 마음에 면세점 종업원에게 샤워룸이 있냐고 물으니 한쪽 구석을
가리킨다. 정말 무료 샤워룸이 있었다!
그것도 도어를 열고 들어서면 좌변기와 세면대, 그리고 칸막이가 되어있는 샤워실이 있고, 안은
혼자 사용하도록 잠금시설까지 되어 있다.
이런 고마울데가......
하루종일 더운 빠당바이에서 땀에 절어있어 몹씨 불쾌한데다 비행기를 타면 옆사람에게 내
땀냄새를 맡지 않게 해야하고, 게다가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데 땀범벅인 몸에 새로운 옷을
걸친다는게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옷을 전부 갈아입고 나오니 직원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들어 가서 청소를 한다.
괜히 미안할 정도다.
발리 섬에서 불만스러웠던 기분들이 다 벗겨져 나가는것 같이 기분이 개운했다.
다른 공항에도 이런 시설이 있었던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것 같다.
자, 이 여정도 막바지니 발리의 색깔을 떠올려보자.
나에게 발리는 '진한 검정에 가까운 회색'이다.
사원의 벽들, 그리고 신상(神象)들, 사원을 덮고 있는 지붕. 그런 색들이 진한, 검정에 가까운
회색이기도 했지만 관광산업에 목숨 건 사람들의 색깔 같아서다.
'발리'라는 발음에서 오는 발랄함, 왠지 낭만적이며 푸른 바다가 연상되는 이미지에서 이젠 나에겐
조금은 퇴색된 이미지로 남을것 같다.
물론 발리가 인도네시아의 모두가 아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도네시아의 아주
조그만 섬 하나를, 그것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고 이 나라를 정의한다는건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인도네시아는 검정에 가까운 회색으로 머리에 남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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