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6) 발리, 그리고 우붓

운농 박중기 2017. 11. 6. 13:46

2017. 10 17 (우붓)


이른 아침, 6시쯤 눈을 뜨니 금방 비가 갠듯 온 사방에서 닭들과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하다.

이곳의 아침은 늘 이렇다.

마치 '나, 여기 살아있어!' 하면서 경쟁적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멋진 흰 꽃이 만발한 눈 앞으로 비둘기만한 새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그 바람에 아직 떨어질 준비가 안된 꽃송이가 마당 잔디밭으로 떨어져 내려앉는다.

평화롭고 황홀한 아침 정경이다. 사람사는 동네는 이래야 한다. 


그나저나 이곳에 사는 양반들은 어떤 기분일까?

우리네 처럼 봄이면 새싹이 돋고, 여름이면 무성한 잎이었다가 가을이면 붉게 물들었다가 겨울엔 앙상한

가지가 차가운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초목들을 보는 우리네와, 사계절 없이 마냥 푸른 초목, 끊임없이

피는 꽃들을 보며 사는 이 양반들의 기분은?

뭐, 우리는 우리대로, 이 양반들은 이 양반들대로 본래 그렇거니 하고 살겠지만 쌓인 정서는 많이 다르지

않을까?

논촌에 사는 내 입장에서 좀 이상한 것은 이런 습하고 더우며 항상 비가 오는 환경이라면 당연히 모기가

많고, 온갖 벌레들의 공격이 우리네 보다 훨씬 많을거라는 생각이었지만 오히려 그 반대인것이 참 희한하다.

모기가 없진 않지만 우리네 여름하고는 비교가 되질 않고, 그외의 벌레들에게 물리는 일도 없어 가지고 온

버물리를 꺼내지도 않았다.

우리네 모기란 녀석은 한철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니 그렇게 끈질기게 달라붙고, 한번 물리면 부어 오르도록

독한 녀석들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선 몇차례 모기에 물렸지만 잠시 가렵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가이드북 '인사이드 발리'에서 찾은 산책길을 진입하는데엔 지점 표기에 오류가 있었지만 어렵진 않았다.

메인 도로에 있는 스타벅스 옆길 '까정 로드'를 따라 2시간 정도 소요되는 산책길은 초입에선 꽤 넓다가

방갈로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밀림이 시작되었다.

잠깐 으스스한 길이 있었지만 곧 편안한 길이 나오면서 주로 오가닉 카페와 논 가운데에 있는 풀빌라들이

나타났다.

호텔들이 논 가운데 있는것이 특이하다 할 수 있겠지만 우리네 처럼 늦가을부터 이른 봄이 올때까지 황량한

논이라면 이처럼 숙소따윌 지으려고 꿈도 꾸지 않았겠지만 여긴 일년내내 푸르름이 있는 곳이니 이런 형태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네 논과 별로 다를게 없지만 논과 논의 경계사이에 키 큰 야자수가 병풍처럼 서 있는 모습이 우리와

달리 이색적으로 보인다.

숙소들마다 꽃들과 조각들, 온갖 장식으로 치장하고 숙박객들을 맞는 이들과, 우리처럼 덩그러니 건물만

지어놓고 '들어 와, 들어 와!' 하는것과 비교된다.

특히, 옛날엔 분명 가옥이나 작은 사원이었던 곳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대부분의 숙소에는 거의 다

정원이 있고, 정원에는 작은 탑들과 동물들의 석조상, 연못, 꽃밭 등이 조성되어 있다.

풀 한포기 없는 도로 옆에 서 있는 우리의 숙소와 달라도 한참 다르다.


내일은 이곳 Suryadina의 방을 하루만 비워 주어야 하므로 이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I ketut kuaya 에

방을 예약해 두었다.수영장이 있다고 해서 들어갔더니 25만 루삐짜리 방은 다 찼고 50만 루삐의 스윗트

룸(!)만 비었다고 해서 방을 보고 구두예약 했다.

명색이 스윗트 룸이라고 엄청 깨끗하고, 발코니도 수영장이 내려다 보이는 멋진 곳이었다.

이런 가격에 이런 훌륭한 곳이라니......


비가 내려 일과를 일찍 접고 숙소에 와서 쉬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거리에 있었다면 시궁창 쥐꼴이 될

뻔 했다. 스콜이라는 것이 우리네 집중호우와 같아서 인근 찻집이라도 근처에 없다면 홀딱 젖기 딱

좋기 때문이다.

젊은애들에겐 그것도 낭만일지 모르나 우리같은 늙은이는 꼴불견일게 뻔하니 말이다.


                 여행자와 젊은이

                                  - 탈린에서 - 


여행자인가 이곳 젊은이인가

고래 고래 고함친다


맞은편 젊은이 맞장구치며 같이

소리 높인다

광장 전체가 떠들썩 생기 넘친다


광기인가 객기인가


여행자인가 이곳 젊은이인가

옷을 벗더니 팬티바람으로 분수에

뛰어든다.

친구들의 박수갈채가 분수처럼

퍼진다


취기인가

치기인가


술은 사람을 낯선 여행으로 이끌고

여행은 술 마신 듯 사람을 취하게

만들지


자기 땅을 못견뎌하는 여행자인가

자기 시대를 답답해 하는

젊은이인가


여행자는 다른 땅을 그리는

젊은이고

젊은이는 다른 시대를 꿈꾸는

여행자인 것을


객기에 꽂힌자

늘 설레는 사람


여행자는 어디에 가든 젊은이

젊은이는 어디에 살든 여행자인

것을


인도네시아로 출국하는 날 노영민 씨가 보내온 시다. 그가 가족들과 여행중 탈린에서 쓴 시를 출발하는

내게 보냈다.

'자기 땅을 못견뎌하는, 다른 땅을 그리는, 다른 시대를 꿈꾸는......' 그의 시어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여정 도중 몇번이고 그의 시를 꺼내 읽을 것 같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기억 꿈 사상' 프롤로그는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이런 글로 시작했다.

읽기도 전에 이 들어보지 못한 얘기가 흥미로워져서 그의 글을 '끝까지 읽겠구나'하고 직감했다.

융의 글은 처음 접하는 것이라 그의 얘기를 처음부터 지겨워 하면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다.

대개의 철학자나 사상가의 글이 재미없고 별로 읽히지 않는것은 '그것을 의무적으로 읽도록 씌여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글을 쓰고, 그것을 간행물에 넣든지 단행본으로 만들 의사를 가진다면 우선 읽기 쉽게 쓰야한다고 본다.

읽기 쉽게 쓰기가 도무지 어렵다면, 그의 머릿속에만 넣어 두든지 논문으로 남겨 후학들이나 학자들의

연구용으로 만들 일이다.

일단 그의 책을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낮에 비가 계속해서 온다면 진도가 많이 나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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