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수요일 (상트 뻬쩨르부르그)
남의 나라에 갔을땐 어느곳이든 도착한 다음날 새벽엔 그 도시의 냄새를 맡기 위해 거리에 나갔었다.
빈과 뮌헨에선 횅한 느낌, 카트만두에선 익숙한(왠지!) 냄새, 타우랑가에선 산뜻하고 깔끔한 공기가
피부에 기분좋게 닿는 느낌, 델리에선 경악할 냄새와 진한 오염의 냄새......
여기서는 거대하면서도 세련된, 그러면서도 낙후된 옛 영화(榮華)의 냄새가 난다.
모스크바 역을 둘러보고 거리를 걷다가 미니마켓에도 들러 두리번거린다.
검은 철문이 반쯤 열린 안쪽 회랑을 들어서니...... 라스꼴리니코프가 왜 이 도시에서 태어났는지를
알겠다.
그는 저 5층쯤의 어딘가에서 바깥 뜰을 내려다 보면서 그의 음울한 꿈을 지긋이 저주하며 내려다 봤을 법
하다.
그가 외투속에 도끼를 감추고서 마르파 노파에 이어 리자뻬따 까지 죽인후에 급히 계단을 내려오며
안쪽 뜰의 인기척을 살펴봤을...... 그런 곳이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출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그런 안뜰.
어젯밤의 느낌과 다른 이곳, 기대된다.
거나하게 차린아침을 먹고 거리로 나선다.
거리는 어젯밤 당도해서 느꼈던 '광활함'의 느낌과 다르지 않다.
넵스키 대로쪽엔 사람들로 넘쳐나고, 모스크바 역사(驛舍) 앞은 조금 한산하다.
우선 넵스키 대로의 최북단에 있는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으로 향했다. 도로 양 옆으로는 고색창연한
대형건물들이 도열해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진하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선지 진한 향수를 뿌려 묘하게 역한 냄새가 난다.
여기 여성들은 놀랄 정도로 세련된 옷차림들이다. 흔히 러시아 여성들이 미인이 많고, '쭉쭉빵빵' 어쩌고
하지만, 그것보다도 그들의 옷차림이 멋있다. 다리가 길고, 금발에다 깊은 눈매를 하고 있으니 매력적일
수밖에...... 젊은 여성들 뿐만 아니라 중년 또는 노년의 여성들도 상당히 세련된 옷차림이다.
유심히 보면 우리네 처럼 유명 메이커의 표식이 붙어있는 옷은 보질 못했고, 값비싼 옷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외모가 그들의 옷차림을 돋보이게 하고 있는 듯하다.
대체로 몸이 곧고, 다리가 상당히 길고 미인형이 많은데다, 옷차림까지 세련되어 넵스키 거리는 온통 여성
모델과 배우들로 가득한 것 같다.
마침내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당도하자 설레기 시작한다.
이곳에 오기로 결심한 주요 이유중 하나가 도스또옙스키를 만나겠다는거였으니......
관람료를 내고(수도원의 묘지를 보는데도 이들은 돈을 받는다) 들어서니, 오른쪽에 그의 청동 흉상이 얹힌
묘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그의 흉상은 돌로 새긴 두 권의 책을 얹어놓은 위에 자리했는데, 그 앞에 무릎꿇고
앉으니 울컥 가슴속 빗장이 열리는 듯하다.
이 양반은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내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세계관과 신관(神觀), 철학, 종교, 가치관...... 그의 교시(!)를 받지 않은것이 없었다.
마침내 나는 40여년 동안 오고자 했던 상트 뻬쩨르부르그의 그의 묘지 앞에 무릎꿇고 앉게 된 것이다.
그의 무덤앞은 누군가가 빗질을 잘 해 두었고, 벤치도 하나 있다. 그의 흉상 앞에 한참동안 앉았다가 그가
누운 자리의 흙을 봉지에 넣어 간직했다. 이제 이곳에 온 목적의 반은 이룬것이다.
그의 마지막을 봤다면 그의 처음과 과정을 봐야할 터, 그의 생가가 있는 '도스또옙스키 박물관'을 찾았으나
이런! 개보수 작업을 한다고 10월말이 되야 다시 문을 연단다.
실망감을 안고 돌아서는데 일본인 젊은 여성도 그 앞에서 아쉬워 어쩔줄을 모른다.
내 생애 전반을 지배했던 그의 생애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넵스키 대로의 야경도 구경할 겸 뻬쩨르부르그에서 모스크바 왕복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모스크바 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새벽에 산책 삼아서 갔던 매표소는 문을 닫아 버렸다.
아니, 이 동네는 야간에 표를 팔지 않는것 아냐? 하며 그냥 나오려다가 역사 구내 한켠의 작은 건물이 있어
들어가 봤더니 그곳에서 표를 팔고 있었다. 대체 이들은 아무 표식도 해 두지 않은채...... 하긴 그들의 룰
이라면 뭐, 할 말이 없다.
낮엔 매표소에서 표를 팔다가 야간엔 그 별도의 건물에서 팔기로 했다면, 그리고 그들과 뻬쩨르부르그
시민들이 알고 있다면 뜨내기 외국인이 불평하기로...... 무슨 소용일까.
창구 여직원은(모든 창구 직원은 중년 여성이었다) 영어라곤 한마디도 못한다.
가이드 북 '이지 러시아'에 나와있는 예시를 보고 날짜와 시간, 기차 번호, 그리고 왕복표의 시간과 날짜,
여권을 들이미니 표를 준다. 그런데 모스크바에서 뻬쩨르부르그로 오는 출발 시간이 새벽이라 도무지
마땅치 않아 다른 시간으로 바꿔달랬더니(손짓과 메모로 겨우!) 이번엔 추가 금액이란다. 일종의
패널티로 여겼더니 그게 아니고, 똑 같은 기차지만 출발시간별로 요금이 다르니 그 차액을 내라고 한다.
실랑이 끝에 겨우 알아듣고(피차 일반이다) 표를 바꿔준다.
그런데 이 아줌마가 여권을 들여다보며 계산기를 두드리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액 말고,
여권의 무엇을 계산(?)하며 계산기를 두들기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지만 왕복 기차표를 샀다는데
안도하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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