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1일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다짐 했던 '내일은 하루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야지'
했던 걸 잊는다.
내 딴엔 컨디션 조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지나온 오랜 병증에 대한 트라우마)
잊는 걸 보면 몸이 제 기능을 찿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작은 배낭을 챙겨 거리로 나선다.
이웃집 아줌마 국수집을 눈여겨 봐 두었는데 주저없이 들어가니 아줌마가 약간
의아한듯...... 현지인만 드나드는 곳이라 외국인의 방문이 익숙치 않았나 보다.
그러나 아침에 우려낸 돼지 육수에 국수를 한번 담궜다가 건져내어 그릇에 얹고
그 위에 다시 뜨거운 국물을 부은 다음 '돼지고기?, 혹은 닭고기?'하며 고명으로
어떤 것을 올릴까를 물은 다음 '돼지고기!' 하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잘게 다진
돼지고기 고명을 듬뿍 얹는다. 그리곤 '노 팍세?' 또는 '노 팍치?' 하고 재차 묻는다.
'노 팍치 또는 노 팍세' 라는 건 '채소 얹지 말까?' 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고수'라는 채소를 얹지 말까?'라는 의미로 묻는 것 같다.
외국인들이 고수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얘기다.
고수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맛을 들이면 매니아가 되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니다 싶어 '그래요, 노 팍세!' 하고 만다.
그래서 그녀는 고수를 뺀 채소를 잘게 썰어 국수위에 얹고, 여분의 쟁반에 내가
모르는, 약간은 고수 냄새가 나는 채소와 양상치, 껍질째 먹는 콩 약간, 조그만
라임 한조각, 그리고 채소를 찍어 먹을 용도로 동전만한 종지에 땅콩과 젓갈이 섞인
잼(우리네 된장의 용도)을 내 놓는다.
역시 현지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국수집의 맛은 우리 입맛에도 맞다.
한그릇 뚝딱 해치우고 내일 아침 또 오마 하곤 왕궁쪽으로 ......
아무래도 오늘은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뱃놀이를 하고 싶다.
그렇지만 해가 지는 시간에 많이들 타는 이른바 '썬셋 크루즈 (거창하다!)'가 제격
이니 그때까지 시간을 보내려면 자전거를 빌려야겠지......
'달라마켓' 맞은편에 철물점과 자전거 판매업을 하는 영감님이 자전거 대여점도
겸하고 있다. 이 영감님은 영어를 꽤 한다. 풍모로 봐선 '은퇴한 교장 선생님' 같은
분인데 영어의 수준은 나보다 훨씬 낫다.(하기야 내 영어 수준이라는게 '수준'으로
말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자전거를 빌려 달라고 하니 단박에 '패스포트!' 한다. 자전거 1대 대여하는 담보물
치곤 너무 확실한 담보물이다. 다른 나라에선 현금을 담보물로 잡았다가 나중에
돌려주는 예가 많았는데, 라오스에서는 모두 여권을 담보물로 잡았다.
영감님은, 여권을 받으면 두말없이 자전거를 내 주던 여느 집과는 달리 영수증을
꺼내더니 내 여권을 뒤져 이름과 국적, 대여시간과 반납시간 등을 꼼꼼하게 적더니
사인 하란다.
자전거를 내게 인계하며 안장을 내 키에 맞게 내려 주더니 '자동차와 마주 달리면
안된다', '가장자리 길로 천천히 달려라' 등등 몇가지 주의를 준다.
다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예, 잘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하곤 빠져 나온다.
'하여튼 교사 출신들이란......'하며 아예 영감님을 교장선생 출신이라고 단정하고서
말이다.
루앙프라방 골목길은 참 아름답다. 폭이 2미터가 조금 넘는 곳도 있고, 3미터 정도
되는 골목길도 있지만 바닥엔 거의 붉은 벽돌을 깔아 놓았고, 가장자리에는 예외없이
화초를 가꿔놓아 정겹기 한량없다. 그 골목안에는 세탁소도 있고 조그만 찻집도 있고,
예쁜 카페도 출현하고 게스트하우스의 뒷문도 나온다. 고양이가 다소곳이 졸고 있고
이 나라 사람들과 닮아 순한 강아지들이 여행객의 발길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고
앉아 있다.
남의 나라에 갈때마다 체험하는 일인데 '내 나라의 짐승들은 왜 그렇게 사납고, 경계
하고, 가까이 하는걸 그렇게 싫어할까?'라는 일이다.
가령, 한국의 골목에서 중간 체구 이상의 목줄이 풀려 있는 개를 만났다고 치자.
필경 우리는 개를 경계하게 되고, 개 역시 슬슬 피하거나 짖거나 하는것이 일반적
일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가 그러하다는 얘기다.
목줄이 묶여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또 고양이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
특히 뉴질랜드에서 의아하면서도 탄복했던일이 그 점인데, 새나 개, 다람쥐, 고양이
등등 우리가 일상으로 자주 보게 되는 짐승들이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서슴없이
사람 곁에 오고, 사람이 다가가도 별로 경계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인 점이다.
네팔에서도 그랬고, 인도에서도, 피지, 체코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왜 짐승들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그렇게나 갖게 된 걸까?
외침이 잦았고, 큰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가는 사나운 나라에 대한
트라우마의 유전 때문일까? 아무튼 한국을 제외한(내가 가 본 나라들) 나라의 짐승
들이 인간을 피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 점은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 점은 우리네가 한번쯤 그 원인을 밝혀보고 연구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짐승들이 인간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면...... 이건 좀
슬픈 일이다. 잠깐 옆 길로 샜군......
이 도시가 수많은 외국인 여행객들로 붐비기 전의 모습을 정말 보고 싶다.
지금보다 훨씬 정겹고 예쁘고 사랑스런 도시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골목길을 지날때 마다 자전거를 멈추고 카메라를 들어야 했다.
어느 골목에선 고양이가 졸고 있고, 노부부가 평상에 앉아 얘기 하고 있고, 연기가
피어나는 곳은 찹쌀밥이 지어지고 있다.
저녁때가 다가오자 메콩 강 선착장 쪽으로 향한다.
내 시선을 날쌔게 알아차린 젊은 뱃사공이 재빨리 다가온다.
'US 달러 20! 1시간!'
'비싸......'
'그럼 얼마하면?'
'......'
그럼 1시간에 10만낍'
'좋아'
흥정은 간단히 끝났다. 1시간 뱃놀이에 우리 돈 1만 5천원 정도, 그렇지만 이 친구의
배를 보고는 마음이 편치 않다. 꽤 큰 배로 좌석이 10석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큰
배를 혼자 타는줄은 몰랐으므로 너무 깍았나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황토빛 메콩 강을 거슬러 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라오스 들어 와서는
도무지 바람이라는 걸 맞아 본 적이 없어서 '아하! 여기는 강물에 배를 띄워야만 바람을
맞는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바람을 굉장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여기가 너무 좋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남쪽'
남쪽이라고 굳이 밝힌건 여기가 북한과 수교하는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왜 혼자왔어?'
'......'
'애들은 몇이야?'
'둘, 아들 하나, 딸 하나. 넌?'
'난 싱글!'
'그래? 왜 아직 싱글이야?'
이 부분에서 이 청년은 뭔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짐작으론 제 아버지, 엄마, 누나
등등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집안 사정을 얘기하는 것 같고, 여하튼 이러쿵 저러쿵 해서
장가 갈 형편이 안된다는 얘기 같다. 깊히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라오스엔 언제 왔어?'
'10월 24일 도착했어. 비엔티엔, 방비엥을 거쳐 여기로'
'그래? 그럼 얼마나 더 있을거야?'
'일주일 더'
'오호! 그래? 어디가 제일 좋았어?'
'방비엥도 좋았지만 여기가 더 좋네'
'그래 고마워'
'라오스 처녀들은 참 예뻐'
'난 별론데...... 한국 여자들이 이쁘던데?'
'아냐, 라오스 처녀들이 훨씬 더 이뻐!'
그는 별로 수긍하지 않는다는 몸짓이지만 싫지는 않은것 같다.
메콩 강을 거슬러 그 황토빛 물살을 가르니 해가 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뒤에서 보트가 속력을 내 달려오더니 살짝 배 옆구리를 부딪고 추월한다.
그리고는 청년에게 큰 소리를 냅다 지른다. 청년은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갑자기 속력을 높혀 뒤쫒기 시작한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다가 둘은 나란히 달리며
신나게 떠들어 댄다.
'네 친구야?'
'맞아, 내 친구야'
그는 곧 오른쪽 강변의 선착장에 배를 대고 내려서는 친구에게 큰 소리를 지르곤
숲속으로 사라진다.
'저 친구는 왜 저리로 간대?'
'저 친구 집이 숲을 지나 있어. 쟤는 아침에 출근 했다가 지금 퇴근하는 거야. 쟤는
아들만 셋이야'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배가 뱃머리를 돌린다. 이제는 엔진을 끄고 흐르는 물살에 배를
맡긴다.
배는 소리없이 미끄러지고 해는 산마루에 걸렸다. 아름답다. 황토빛 강물위로 지는
해는 이채롭다.
배삸을 치르고 이름을 물었더니 '에이 아이'란다.
'알파벳 AI?'
'맞아!'
이 녀석 제 이니셜을 말하는거야? 그게 멋있게 들리나 봐.
외국인 여행객들을 주로 상대하는 녀석의 직업으로는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다음에 마누라랑 같이 오면 네 배를 탈게. 싱글 탈출!'
'고마워, 싱글 탈출! 그런데 몇 살이야?'
이 녀석 어른 나이를 묻는건 네팔 녀석들이나 이 녀석들이나......
'육십 둘'
'오, 그래? 내가 보기엔 당신 얼굴로는 오십 다섯쯤으로 보여. 우리 아버지가 오십
다섯이야'
햐, 이 녀석 립 서비스 까지......
선착장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를 타고 저녁 먹으러 아침 국수집에 갔더니 아줌마가
반색을 했지만 자기네는 아침국수 장사만 한단다. 내일 아침 먹으러 오란다.
다시 나이트 푸드 마켓에 가서 카오삐약 한그릇을 먹고 포도 1킬로와 길거리 계란
부침개를 한 장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길거리 계란부침은 조그만 수레위에서 '신나는 아저씨'가 구웠는데, 그의 신난
몸짓이 재미있어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나도 하나! 해서 샀다.
이 친구는 숯불위의 철판에 마아가린 한숟갈을 냅다 던지듯이 하고는 미리 반죽해
놓은 쌀가루 한조각을 꺼내 잽싸게 방망이로 민 다음 공중에 한바퀴 휙 돌리더니
피자 도우가 펼쳐지듯 크게 만들어지자, 재빨리 달궈진 철판위에 던지고는 그 위에
계란 하나를 깨어 넣고는 또 재빨리 접어 사각형 형태로 만들어 굽고는 그것을
꺼내 연유를 살짝 뿌리고는 '설탕을 넣어 줄까?' 묻고는 '노!' 하자 종이위에 척
올려서는 돌돌 말아 내게 준다. 그의 재미있는 노동은 이반 데니소비치는 아니지만
그의 사촌쯤 될 듯 하다.
한개 6천낍, 우리 돈으로 800원 정도. 그 옆 아줌마에게 청포도 1킬로를 사서 비닐
봉지에 들고 숙소로 돌아오니...... 행복했다.
라오스는 묘하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
여기 오래 살면 이 사람들과 쉽게 동화될 것 같은 기분이다.
자전거를 타다가 서로 부딪힐뻔 하면 서로 씩 웃는 것으로 마무리, 길가다 부딪힐뻔
하면 서로 씩 웃는 것으로 마무리. 급하지 않는 운전자들, 골목길에서 절대 불쑥
나타나지 않는 탈 것들, 이런것이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자전거를 빌려 몇일 타고 다녔지만 위험을 느끼거나 불쾌한 상황은 한번도 없었다.
여행객들, 특히 백인들은 자전거 보다는 오토바이 렌트를 많이 하는데 아마도 렌트
비용이 적기도 하지만 사고 위험이 거의 없는 이 나라 사정도 한 몫 하는것 같다.
돌아와 숙소 발코니에서 계란말이 노점상이 말아주던 계란말이를 먹으니 느긋하니
기분 좋다. 비록 거스럼돈을 내 주면서 반죽 만지던 손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돈을
셈해서 주던 모습이 퍼득 떠오르지만......뭐 어떠랴, 여기는 라오스 인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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