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트래킹의 마지막, 치소파니)
트래킹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그러니까 15일째다. 치소파니의 롯지에서 눈을 뜬 것은 아침 6시 30분. 오늘은 이곳에서 물카르카(Mulkharka, 1,859m)를 거쳐 순더리절 까지 이동이다. 사실상 카트만두에 돌아가는 것이다.
순더리절은 카트만두의 외곽지대, 카트만두 시민들의 상수원인 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치소파니의 롯지에서 아침식사를 끝내고 출발 한 것은 8시 30분. 약속이나 한 것처럼 크군과 나양이 함께 출발했다. 헬럼부의 어느 곳과 별 다를 것 없는 풍경을 접하며 계속 걸었는데, 가난한 마을 물카르카에 도착, 차 한 잔을 마시고 순더리절로 향했다.
순더리절이 아래로 보이자 저수지가 나타나고 군인들의 점검이 있었는데 국적, 이름 등을 남기고 내려서자, 저수지에서 한참 아래쪽에 있는 정수장으로 공급되는 수로(水路)인 철관이 길게 뻗어있고, 우리는 철관을 따라 계단을 하나씩 힘들여 내려갔다. 마침내 정류장이 나타났다.
마이크로 버스를 흥정해서 타고 30분쯤 달려 카트만두의 타멜 입구에서 두 독일인 커플과 작별하고 우리 셋은 세르파족 사장이 운영한다는 한국음식 전문식당인 '샹그릴라'에서 삽겹살 정식을 먹었는데 꽤 괜찮다. 우리의 구미 보다는 치린이 좋아한다는 얘길 들은터라 택했는데 맛은 물론 양도 충분하다.
우리는 오랜만에 맥주를 곁들이고, 종이팩에 든 한국의 소주를 주문해서 마시며 치린과의 이별을 아쉬워 했다.
그에게 우리는, 미리 약속된 일당 외에, 팁과 함께 우리가 지녔던 맥가이버 칼을 선물로 손에 쥐어 주었다. 내가 그 칼을 쓸 때마다 그가 유심히 보던 기억이 나서였다.
이번 여정에서 치린은 정말 성실한 조력자였다. 선한 얼굴과 예의 바른 행동과 말, 정한 시간을 지키는 성실함, 가이드 못지 않은 길 안내....... 우리는 참 좋은 동반자를 만났던 것이다.
(2009년의 세번째 네팔 행은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로, 트래킹 일정만 한 달이라 류사장에게 치린을 동행케 해 달라고 요구 했으나 그는 이제 포터가 아니라 가이드가 되었으므로 포터만 필요한 우리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었다)
3월 10일 (다시 세토 머친드러나트)
오늘은 포카라(Pokhara)로 떠나기 전에 카트만두 민박집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그렇지만 보름간을 산과 계곡을 걷던 터라 아침에 눈을 뜨자 습관처럼 일어나 앉았다.
우리는 산중생활 동안 먹지 못했던 채소와 육류를 보충하자는 구실로 타멜로 갔는데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빗줄기가 하나씩 떨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썬쪼크와 인드라쪼크로 방향을 잡고 걸었는데 아침이라 평소의 그 무지막지한 인파는 아니다.
가는 빗줄기(오늘까지 카트만두는 5개월간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거리의 매연과 먼지는 그런대로 가라앉아 있다. 다행이다.
카트만두의 악명 높은 매연과 먼지는 길가의 몇 안 되는 가로수와 높은 담벼락들, 사원지붕, 상점의 차양, 노점상의 좌판, 어느 것 할 것 없이 뿌옇게 만들어 놓고 있었는데 가랑비는 그 먼지 위에 자그마한 얼룩을 만들어 간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가 언뜻 낯익은 곳 앞에 서 버렸다. 다시 세토 머친드러나트 사원(Seto Machhendranath Mandir)이다.
마치 이끌리듯 이곳에 다시 또 온 것이다. 지옥문 같은 입구를 빨려 들어가니 '쿵'하는 소리를 내며 서듯 사원의 그 남감한 자태가 버틴다. 멍하니 이 심상찮은 구조물을 보고 섰다가 건물의 중심부에 모셔진 부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비를 내려주는 역활의 부처니 오늘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도 보인다.
올 때마다 건물의 음산한 중압감에 눌려 제대로 나머지 부수적 소품들을 보지 못한 것이 생각나, 중앙에 모셔진 부처를 자세히 살피니, 얼굴에는 하얀 석회 칠을 바르고 윤곽은 붓으로 그렸는데, 눈은 쉬염부나트나 보우더나트의 그것과 같고, 입은 마치 일본 인형의 입처럼 샤머니즘적, 중성(中性)의 입이다. 몸 전체에는 주황색 꽃목걸이를 겹겹이 둘러놓았고, 머리에는 황금색 관을 쓰고 있으며, 목에는 희고 긴 천들로 감겨있다.
발치 아래는 주황, 흰색의 물감들이 낭자하게 칠해져 있고, 이러한 전체의 형상은 철망으로 가려져 있으며, 철망은 큰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철망 사이로는 참새를 닮은 작은 새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참배 온 사람들이 뿌린 쌀알 등 곡식을 쪼아 먹고 있다.
내 눈에는 묘하게 섬뜩한 자태다. 왜 이 사원은 이처럼 음산하고 침울하며, 난해하고, 뭔지 모를 중압감을 주는 걸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곳에 자꾸 이끌리는 걸까? 마치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자신이 들어가야 할,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공포와 중압과, 다가올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의 문 앞에 선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그렇지만 여기 올 때마다 생각나는 제랄드 메사디에(Gerald Messadie)의 '신이 된 남자'의 글귀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많은 민족들을 보아 왔지요. 그중 가장 무가치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민족들이 바로 종교적 원칙을 가장 엄격하게 지키며 사는 민족들이었지요. 어떤 민족들은 세상이 무(無)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사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그 무로 돌아가려고 하지요. 또 어떤 민족들은 새벽이 오기 전에 세상이 종말을 맞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또 메사디에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는 내가 말했듯이 개인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네. 하지만 질서를 필요로 하는 국가권력이 조직 내에 편입 시켰지. 그들은 상호 배척하지않아. 종교는 도시의 생존을 보증 하네.'
이곳은 종교적 무수한 상념들을 확대 생산하는 곳이다. 나는 이 음산한 사원의 한 귀퉁이에 넋을 잃고 앉았다가 미네가 어깨를 툭 건드리는 통에 마지못해 일어섰다.
그래, 그는 또 이렇게 말했었지.
'신은 우리에게 이성을 주셨다. 이성이라는 것은 악마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부조리(不條理)한 것은 믿지 않는다. 신이라는 개념은 그 하늘의 불꽃들이 야기하는 신성한 공포(恐怖)와 무관하지 않다는 추론이 가능하지.'
미네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입구로 나갔다.
여기 오래 앉아있다간 끊임없이 솟구치는 상념을 감당치 못할 것 같은 기분이다. 참으로 괴이하고 공포스러우며, 난감한 건물이다.
멍하니 건물 앞에 발목 잡힌듯 섰다가 황급히 달아나듯 그 앞을 빠져 나왔다.
우리는 떠나올 때 부탁받은 물건을 사느라 다시 타멜로 돌아왔다. 네팔의 특산품으로 '파슈미나'라는 것이 있는데, 여자용 쇼올(Shawl)로 꽤 알려져 있어, 인기가 있는 것 같다. 부드러운 촉감하며, 가벼우면서도 따뜻하고, 색상은 파스텔톤을 위주로 다양한 고가품(高價品)이었다. 이것을 흥정하는데 재미있다.(다른 물건도 마찬가지지만)
콩글리쉬를 하는 우리와, 정통 영어를 하는 쪽이 아닌 네팔리 상인과의 흥정에는 말이 굳이 필요 없다.
계산기만 있으면 된다. 상인이 1,000루삐를 부르면 계산기에 1,000이라고 찍고, 그 계산기를 180도로 돌려 고객이 600을 찍는다. 다시 상인이 180도 돌려 900을 찍고, 다시 180도 돌려 650, 다시 180도...... 이렇게 해서 '라스트!' 또는 '피니쉬!'를 외쳐 최종합의에 이르면 된다. 그래서 우리네 처럼 떠들썩한 흥정의 현장은 없다. 다만 디테일한 의사표시는, 과장스럽게 표현하는 서로의 표정을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조용하고 재미있는 흥정 현장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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