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9)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운농 박중기 2013. 7. 29. 14:31

3월 6일  ('크' 군과 '나' 양)

 

새벽 6시에 잠이 깨어 침낭 속에서 목만 내놓고 있자니 주방 옆 롯지의 운영자 둘(둘 다 20대 초반의 젊은 총각들)이 자는, 주방 겸 숙소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화로에 장작불을 피우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날까, 좀 더 누워있을까, 어제 내리던 눈은 그쳤을까, 오늘은 눈 때문에 괴로운 그리고 위험한 산행이 되지 않을까, 세수를 할까, 말까...... 여하튼 이런 따위의 생각을 하며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물통을 만지작거렸다.

 코가 막혀있는 것을 뚫는 작업이 더 긴요해서 일어나자마자 세수가 하고 싶은데 주방의 물이 끓기전이므로 밤새 껴안고 잔 이 물통의 물은 더 요긴하다. 막힌 코가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침낭을 벗어나 세수를 하고 마당으로 나서니 다행히 눈은 그치고, 간밤에 많은 눈이 오지는 않아 1센티미터 정도만 쌓여있다.

 이 정도면 아이젠을 하지 않아도 되겠고, 더구나 히말라야의 싸락눈은 밟으면 뽀독거리며 전혀 미끄럽지 않으므로 문제가 될 건 없겠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있으니 내가 보기엔 이십대 초반의 학생 같은 그 독일 청년이 내게 말을 건다.(겁나게도!)

 "태권도를 했다며, 몇 년째냐?"

 "태권도?"

 "당신 포터가 그러던데?"

 "아하! 고 녀석의 농담이다. 나는 오십대의 중늙은이다. 젊었을때 군(軍)에서 조금 했을 뿐이다. 한국의 군인은 다 태권도를 배운다."

 약간 실망한 듯 그는 멋쩍게 웃는다. 얼굴의 솜털이 유난히 보송보송하고 노랗다.

 "나는 킥복싱을 한다. 3년째다."

 요 녀석은 태권도 운운한 나에게 필경 기죽지 않고, 오히려 능가하고 싶은 기색이다.

 "오! 그러냐. 위험한 운동 아니냐?"

 "무릎과 팔꿈치 등에 보호대를 하므로 노 프러블럼."

 "아하! 그래서 네 체격이 그렇게 좋구나."

 "땡큐!"

 녀석은 우쭐한다. 제 여자친구가 이때 곁에 없는 것이 몹시 아쉬운 표정이다.

 이 커플은 가이드나 포터 없이 각자의 배낭을 하나씩 지고 트래킹 중이다. 우리와 카트만두로 돌아갈 코스가 같다. 며칠동안 많이 부딪힐 것 같다. 콩글리쉬가 바닥나지 않게 잘 관리 해야지. 과묵한 채 하면서......

 

 페디에서 곱테(Ghopte, 3,430m) 까지는 3시간이 소요되었다.

 밀림의 킹콩이 출몰할 듯한 산세의 허리를 끼고 걷고 또 걸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며.

 뒤로는 우리가 힘겹게 넘어 온 라우레비나약 패스가 보인다. 우리가 저걸 넘어왔어? 계속 스스로 감탄하면서...... 특별한 경관은 없는 코스다. 그러나 곳곳에 피어있는 희고 붉은 작은 꽃들이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어제 내린 잔설(殘雪)속에서 무리로 피어있는 작은 꽃은 직경 7-8밀리 정도였는데, 그늘지고 습기가 충분한 곳이면 어디든 무리지어 피어 있어 3시간여 산행 내내 우리에게 듬뿍 즐거움을 준다.

 비교적 수월한 산길을 오르내리기를 거듭하며 점심식사 예정지 곱테의 '나마스떼' 롯지에 도착했다. 카트만두가 그리 멀지 않은 고지대라 그런지 라디오에서 남자와 여자 가수 듀엣의 노래가 들린다.

 이들의 라디오에서나 TV에서는 거의 노래, 춤이 일반적인 프로그램이다. 노래는 어느 노래나 우리에게는 비슷하게 들린다. 목소리 역시 비슷하다. 저들이 우리 대중가요를 들으면 역시 그럴까?

 점심으로 달밧을 시켰다. 이곳은 괜찮을까? '마살라'만 넣지 않는다면...... 으...... 마살라!

 

 점심을 시켜놓고 앉았으니 20대의 젊은 이스라엘 커플이 옆 테이블에 앉는다. 그들은 '스프는 뭐가 있니?" 하며 스프의 재료를 보러 쿠커를 밀치고(!) 주방으로 들어가 직접 확인한다. 주방과 식당, 밖을 들락거리던 이스라엘 여자는 결국 무슨 스프인지를 시켜 먹고 둘은 황급히 출발한다.

 왜 스프의 재료를 확인할까? 그들은 여기까지의 여정을 소화했다면 숱한 롯지를 거쳤을 테고, 그 롯지들의 식당에는 뻔한 것 밖에 없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 내가 보기엔, 무엇 때문인지는 알길이 없지만 오만을 위한 제스추어에 불과한 것 같다.

 유럽이나 아시아의 여행지에서 이스라엘 여행객들에 대한 평판이 밑바닥이던 이유를 알 듯 하다.

 치린에게 이스라엘 여행객들에 대해서 물으니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넘버 원 기피대상'이란다. 그들의 '선민의식'이 히말라야 산 속에서도 발휘되고 있는 걸까?

 연이어 페디에서 우리와 같은 숙소에 묵었던 독일 커플이 도착, 콜라 한 병씩을 시켜 먹더니 바로 출발한다. 우리는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 '아니, 제네 들은 콜라만 마시고 가? 스프 한종지만 마시고 가는 거야?'

 달밧을 시켜놓고 배고파 기다리고 있는 우리가 갑자기 가여워졌다. 제네 들은 덩치도 우리보다 크고, 그러면 당연히 위장도 클 것 아냐? 그런데 점심으로 저것만 먹고 간다고? 아침 먹고 그 먼 골짜기를 3시간 동안 우리와 같은 코스를 걸었는데...... 우리는 중간에 배가 고파 양갱이며, 초콜릿을 먹었는데...... 아이고, 도대체 제네 들은 저래도 끄떡없단 말야?

 우리네 국내(國內) 산행이면, 아침 든든하게 챙겨먹고(밥심으로 간다며!) 점심때면 우르르 보따리 풀어서 지지고 볶고(요즘도 달라지지 않았다) 든든하게 챙겨먹고 출발, 이래도 저녁에는 출출한데......

 먼저 떠난 저들을 잊고 천천히 출발, 예의 꽃들이 지천에 만발한 산등성이 길을 걷고 또 걸어 타레파티(Tharepati, 3,510m)에 도착했다. 아침에 페디에서 8시 40분에 출발하여 타레파티에 오후 3시 5분에 도착했으니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6시간 25분이 소요됐다.

 

 타레파티는 '야크&예티' 롯지에 여장을 풀었는데, 어제의 독일 커플도 같이 여장을 푼다. 그들은 여기 도착해서야 점심으로 채소 왕만두(베지터블 모모)를 시켜 먹는다. 아무렴 그렇지! 지 녀석들이라고!...... 우리는 그제야 안도(!)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올라오면서 촬영해 둔 큰 바위 아래 딱 한 곳에만 피어있던 이름모를 아름다운 노란 꽃을 보여주며 "니들 이 꽃 봤어?" 하고 물었다. 여자 애가 "아니, 못 봤어." 우리는 고소해 했다. 여자애는 몹시 아쉬워 한다. "그 꽃 이름 알아?" 한다. 우리가 알 리가 없잖아!

 

 게스트 룸에 들어가니 역시 벽에 못이 하나도 없다. 긴 산행을 마치고 여장을 풀면, 방의 벽에 모자며 땀에 젖은 입었던 옷이며, 수건 등등 걸어야 할 것이 많은데 도대체 이곳 방에는 못이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없다.

 우리네 시골집이나 여관방에 그 흔한 못이(혹은 옷걸이) 말이다. 오늘은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 주방에 가서 젊은 주인에게 "망치 있어?"  "오, 있지."  "빌려 줘."  망치의 손잡이 부분이 짐작대로 못을 뺄 수 있는 형태다. 롯지 전체가 목재로 되어 있는지라 잘 살피면 틀림없이 이 부실한 집안에 못이 솟아있는 것이 있으리라. 짐작대로 여기저기...... 일곱 개를 빼서 방안에 못질을 했다. 미네 에게 나의 뛰어난 임기응변을 뽐내며 벗어놓은 옷들을 정리했다. 좁은 방안은 금방 질서를 찾는다.

 카트만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눈에 띄는 것을 덧붙여 말하자면, 이곳 사람들의 좋지 못한 습관중의 하나인데, '수리(修理)', 또는 '수선(修善)'의 개념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집은 한번 지어놓으면 그것으로 끝. 담벼락과 화단, 창고, 주방, 무엇이든 한번 만들어 놓으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문손잡이가 떨어져 나갔으면 떨어져 나간대로, 담벼락이 무너졌으면 무너진대로, 나무 침상의 한쪽에 못이 빠져 삐걱대면 삐걱대는 대로, 난로의 연통이 빠져 연기가 식당을 덮고 있으면 있는 대로...... 이런 식이다. 그것을 수선하고 개선한다는 개념이 희박한 것 같다. 심지어는 카트만두의 식당, 조금 나은 레스토랑, 게스트 하우스까지 고장 난 곳을 새로이 고쳐 쓴 흔적이 별로 없다.(고친 흔적은 금방 알 수 있는 법이다) 왜 그럴까?...... 아이고, 내가 알 방법이 있어야지!

 

 황혼이 오자 독일 청년('크리스토퍼'라고 했다)과 같이 사진을 찍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막 태양이 꼴까닥 하는 장면에 둘이서 셔터를 눌러댄다.

 커플중 처녀애('나딘'이라고 했다)가 내게 묻는다.

 "처음 왔을 땐 안나푸르나를 트래킹 했다며? 그곳은 어땠어?"

 "굉장했다. 특히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서 바라본 마차푸츠레가!"

 "나도 다음 여행지로 어떨까 해."

 "저 남자 네 애인이냐?"

 질문을 해 놓고 내가 생각해도 딸 또래의 애 에게 참 바보 같고 쓸데없고, 한심하다.

 "천만에, 그는 그냥 남자친구일 뿐이다. 내 애인은 독일에 있다."

 "그래?"

 도대체 우리네 머리로, 저렇게 몇 주 넘게(그들이 몇 주가 넘었다고 했다) 둘이서 같이 잠자며 그냥 친구? 더구나 '내 애인은 독일에 있다'니, 아무리 지구 반대편이 고향인 그들과 우리지만 괜한 소린지 뭔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