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9일 (베네치아 -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가는 열차는 특별할 것 없는 농촌풍경을 보이며 많은 터널을 지나 달린다.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서 베네치아 행 티켓을 사면서 미리 피렌체 행 열차표도 예매해 두었었다.
피렌체도 한인 민박집으로 예약했는데, 로마의 민박집 주인장이 소개한 집은 전화를 하니 별로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몇 명이냐고 물어서 혼자라고 했더니, 그러면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비수기에 한 명을 받아 난방해 주랴, 밥 해 주랴......별 소득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소개를 받고 전화를 한 사람에게 너무 성의없는 대답이라 좀 서운하긴 하다. 그렇지만 뭐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다.
할 수없이 다른 집을 물색해 예약했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요즘 같은 철엔 얼마든지 방이 있지만
주소와 약도가 그려진 바우쳐를 받으려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남아도는 방이 있다해도 어디에 숙소가
있는지 알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달리는 열차 차창엔 요 며칠만에 햇빛이 내린다.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에겐 햇빛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비오는 날엔 나이에 맞지 않게 센치해지고
먹구름 가득 낀 하늘 아래 걷기는 우울하다.
역시 계절에 맞춰 길을 나서는 것이 좋다는걸 확인한다. 어느땐가 본 아이슬랜드의 바람불고 잔뜩 흐린
날씨의 황량한 도로가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역시 환한 햇빛 아래의 나그네 길이 좋은 것이다.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를 '낯선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신선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것을 '현지인의 자세'로
수용하고, 그 수용을 통해 자기 세계관의 폭을 한 뼘씩 키우는 행위다' 라는 말이 있다. 동감이다.
언젠가 누가 내게 질문했다.
'여행과 관광이 뭐가 다르죠?'
'많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그런걸 구분하려 하지요?' 하니
'어감이 많이 다르잖아요' 한다.
그래서 오쇼 라즈니쉬의 '도마복음 강의'에서 한 말을 대신했다.
'힘있게 존재하라, 그대 자신을 주장하라, 그대의 발로 서라, 군중의 희생물이 되지 말라, 생각하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시작하라, 그리고 그대의 고독한 길을 가라, 무리 속에 있는 양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랬더니, 이 친구 시큰둥한 표정으로 '너무 심각한 것 아니예요?' 한다.
'여행을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여기며 하란 뜻이요' 하고 말했다.
피렌체역에서 내려 민박집 바우쳐를 휴대폰으로 보며 길을 묻고 찾아 약 20분후 두오모 성당 앞에 당도했다.
말로만 듣던 두오모 성당은 그 엄청난 크기에 기가 질린다. 두오모를 뒤돌아 높은 성탑이 있는 길을 접어들자
주소에 있는 길이 나왔다. '올리브 민박'. 여기도 주인장이 남자 혼자인데, 비수기라 부인은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역시 연변 조선족 출신이다.
러시아 뻬쩨르부르크, 체코 프라하, 네팔 카트만두, 독일 뮌헨, 터키 괴레메 등등 여태까지 한인들이 운영
하는 숙소에 묵은적이 있었지만 전부 한국에서 건너가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딜가도
연변 조선족 출신들이다.
그런데 이 양반들이 대체로 다 성실하고 인정이 있으며, 한국 출신들 처럼 약삭 빠른 이익 위주의 인상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오래토록 했음에도 아직까지 순박함도 잃지 않았다.
두오모 성당은 대단한 위용을 자랑한다. 도무지 왜 이런 엄청난 규모의 성당을 지어야 했는지 짐작할 수 없다.
두오모의 외양은 그리 아름답다고 할순 없다. 그 어마어마한 덩치에 외양의 대리석에 줄무늬를 넣어 내가
보기엔 부조화스럽다. 정면과 측면의 조형미도 별로다. 너무 덩치만 키우다 보니 전반적인 균형미가 깨진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와 거의 같은(외양이 전부 대리석으로 치장된) 양식인 인도의 타지마할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두오모는 '자기 과시'에 몰두한 나머지 덩치만 키우느라 실패한 양식 같디.
그렇지만 피렌체는 어느 도시보다 세련미가 있다.
로마나 베네치아 보다 뭔가 품격이 느껴진다. 도시는 깔끔하고 잘 단장되어 있다. 그리고 풍요로움이 보인다.
내일부터 살펴 봐야겠지만 이 은근한 세련미는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궁금하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곳이라 그럴까? 미켈란젤로, 단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곳 피렌체 출신이며, 신(神)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 개벽한 르네상스를 주도한 메디치가(家)의 이 도시, 그리고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피치 미술관이 있는 도시......
대충 둘러 보다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이 세련된 도시를 돌아 볼 생각을 하니 가슴 설렌다.
잠자리에 누워 두오모의 압도적 크기를 생각하며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 썼던 문구가 생각난다.
'태생도, 성장배경도 자기와는 동떨어진 이른바 '귀골'에게 하층민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경외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비합리(非合理)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더 순순히 들어 오는것은 합리적인 이성보다
비합리적인 감성이다. 하지만 실력으로 지위를 얻은 사람이 비합리적인 것에 더 익숙한 일반 대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 대중과 거리를 두는 것인데, 거기에는 시간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감성에 좌우되기 쉬운 인간을 상대로 계속 지도자의 지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친근감을 갖게 하면서
거리감도 품게 할 필요가 있으니까.'
두오모를 비롯한 로마의 수많은 성당들이 그렇게 엄청난 규모인 것은 '비합리'를 지향하고, 대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한 포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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