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4)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운농 박중기 2013. 7. 29. 09:41

2월 18일  (혼란과 소용돌이의 거리)

 

오늘은 파턴(Patan)행.

 아침 8시를 넘어 나섰다가 지녁나절에야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10시간을 걸은 것 같다.

 카트만두를 이렇게 걷는다는 건 거의 미친 짓이다. 이틀을 걷고 나니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이 혼란과 소용돌이의 거리를 이틀 동안 하루 종일 걸었으니......

 파턴은 럴리트푸르(Lalit Pur,美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내가 보기엔 아름다운 폐허의 도시다.

 왜 폐허의 도시라고 표현 하는고 하니, 네팔의 건축물 전시장 같은 이 도시는 아예 보존이나 보호의 개념 없이 관리하여, 방치해 둔 것이 그러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스투파와 석상, 목조 건축물들은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고 그 구성의 치밀함과 화려함은 당시 이 도시를 일으킨 네와르족의 솜씨로 경탄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음에도 말이다.

 파턴 게이트를 들어서기 위해선 버그머띠 강(Bagmati Nadi)을 건너야 하는데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올라선 버그머띠 다리에서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온갖 쓰레기, 개, 돼지, 염소들의 시체들이 강을 어지럽게 메우고 있다.

 시궁창이 된 강은 내가 보기엔 적어도 10년은 정화사업을 벌여야 될 지경으로 새까맣게 오염되어 있다.

 이 미의 도시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 오염원들 위를 악취를 참아내며 건너야 했다. 우리네 LG, 삼성의 기업광고 간판들이 유독 시선에 생뚱맞게 잡힌다.

 더러바르 광장(Durbar Square)에 들어서니 거의 박타푸르와 비슷한 사원들이 눈앞에 가득하다.

광장을 반쯤이나 차지하며 TV중계 장비들이 진을 치고, 한쪽에는 행사진행자인 듯한 기생오라비 같은 청년이 말쑥한 양복을 차려 입고(말쑥한 양복은 카트만두에서는 정말 희귀하다!) 무어라고 수다스럽게 떠들어 대고 있고, 주위에는 군인, 관광객, 하릴없는 청년들, 그 청년들을 흘끔대는 여자애들이 기름독에 빠진 듯한 청년의 말을 듣고 있다.

 관광객 외에는 현지인 모두가 아마도 아무 할 일이 없어, 이 보기 드문 이벤트에 잔뜩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듯 하다.

 하긴 카트만두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수도 고치는 골목길에 예닐곱 명이 들여다보고 있고, 상점 페인트칠하는 것을 구경한다고 대여섯 명, 오토바이 광택 내는 것 구경하는데 열명쯤......

 이러니 TV 카메라가 떡 버티고 있는 광장에서야......

 중앙의 광장에 있는 17세기의 정교한 석조(石造)의 크리슈나 사원(Krishna Mandir)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무언가 새로운 구경거리가 벌어질 것을 기대하며 눈을 빛내고 있다. 도대체 저런 어마어마한 유적에 저렇게 멋대로 올라가 앉아 있어도 되는 거야? 유적지에 대한 한국적 가치관으로서는 죽었다 깨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여기서는 예사로운 풍경이다.

 

 파턴 더러바르 광장 한쪽 골든 탬플(Golden Temple)의 멋진 조형미와 위용은 뜻밖에도 주택가에 포위당해 있다. 아마 골든 탬플이 축조되고 난 뒤 그 후로 주택들이 하나 둘씩 들어 선 것 같은데 사원의 불과 2m 안팎을 모두 점령하고 있다. 정면 입구의 문 천정에는 돌에 조각된 만다라가 있는데 그 세공의 정교함은 깜짝 놀랄 정도다.

 사원의 중정으로 내려서니 입구에 서 있던 관리인이 우리의 신발을 가리키며 '가죽이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 한다. 중정으로 내려갈 땐 가죽제품은 소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약 30m 높이의 머하보우더 사원(Mahabouddha Temple) 역시 주택가에 에워싸여 있는데, 9,000개 정도에 이르는 불상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왜 불교도들은 불상의 수를 늘리는데 골몰하는 걸까? 여하튼 이 불교도의 도시 전체에는 수많은 불상들이 사방 곳곳에 촘촘히 새겨져 있다. 사원 주변에는 불상을 제작하는 공방들이 즐비하다.

 

 더러바르 광장을 뒤로 하고 1Km 떨어진 티베트 난민촌으로 향했다.

 고단한 그들의 캠프는 이미 '난민촌'이 아니고 '정착촌'으로 변해 있었다. 조그만 규모의 각 주택마다 '유럽인 들이 이들의 살 곳을 지원했다'는 표찰이 붙어있다.

 핸디 크래프트 센터(Handi Craft Center)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찾았더니 마침 토요일이라 휴무다. 입구의 노인들이 마치 우리네 시골 노인정 마당의 노인들처럼 뭉텅 빠진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시선을 던진다. 영락없는 한국인의 얼굴이다.

 곳곳에 빨래가 널려있고 어수선 하긴 하지만 카트만두 근교의 네팔인 서민촌 보다는 오히려 깨끗한 편이다.

 1959년 티베트의 동란 때 고국을 떠난 난민들이 이곳 네팔에 정착해 살고 있는 곳으로 캠프는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우리는 '난민촌'이라는 명칭에 무엇을 기대(?)했는지 한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뭐야, 아주 멀쩡한 곳이잖아!' 하면서 그곳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 관공서의 담장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포스터를 절반이나 메운 좌우의 두 녀석은 입과 눈, 코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영혼이 뺏긴 녀석처럼 노려 보고 있고, 가운데의 여자는 태권도인지 가라데인지 손바닥을 앞으로 뻗고는 곧 공격을 가할 자세다. 모두들 피를 흘리고 있다. 얼마간의 혈투가 막 벌어진 후에 이제 마무리 결전을 위한 투혼을 불태우고 있는 자세들이다.

 유치찬란, 단순미의 극치를 이 포스터는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포스터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포스터의 색감과 도안이 어쩐지 낯익다. 그래서 우리는 이 포스터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어디서 봤더라? 1960년인가, 1970년대인가? 곰보 시멘트벽에 풀칠을 하고 서너 장 붙여 두었던 신성일, 엄앵란, 트위스트 김의 '맨발의 청춘' 포스터와 언필칭 비슷하다.

 포스터의 색감과 배우들의 표정에서 나는 문득 내 유년과 청년의 시절, 까마득했던 '깡패에 대한 동경'을 떠 올렸다. 요즘의 조폭 영화를 혐오하면서도, 이 포스터에서 '깡패에 대한 동경'을 했었다는 데에 놀란다. 그렇지만 뭐 그 당시의 깡패는 '의리'와 '싸나이'였지 않은가. 요즘처럼 이권과 '조직'이 아닌 '순진한 망동'이었지.

 문득 이 포스터 앞에서 히죽 웃고 돌아섰다.

 

 우리는 카트만두에 다시 지쳤다.

 돌진하는 템포와 릭샤, 오토바이, 자전거, 택시, 버스, 트럭 등 세상의 '탈 것' 들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마치 '내일은 절대 이것을 타지 않을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실컷 달리지 뭐!' 하는 것 처럼 내달린다. 그 한 귀퉁이에는 터번을 두르고 담요 한 장을 어깨에 얹은 맨발의 걸인이 심각하고 귀찮은 표정으로 바삐 걷고 있다. 그의 뒷모습은 '나를 좀 조용히 내버려 둬!' 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먼지와 매연, 숨 막히는 알 수 없는 열기가 온통 거리를 메우고 있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내일은 박타푸르를 지나 너거르 코트(Nagarkot)로 가야겠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내일 아무래도 제 정신이 아닐 것 같다.

 

《파턴 Patan》 카트만두의 남쪽에 있으며 버그마띠 강을 마주 보고 있는 고도(古都), 주민의 80%가 불교도라고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