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

도스또예프스키;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 중 '대심문관'

운농 박중기 2013. 9. 18. 10:27

 

9월 18일자 한겨레 신문 한토마란에 게재된 글 입니다.

내가 일생에 걸쳐 가장 즐겨 읽었던 작가의 글을 인용해 요즘의 시국과 대비해 쓴 글이 하도 재미있어 옮깁니다.

소설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은 인간 세상의 욕망, 이상, 종교, 철학 등등을  심연에서 퍼올려 쓴 글입니다.

그의 소설 '죄와 벌'도 마찬가지지만요.

여기에 인용한 글은 러시아의 문호 도스또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죠프의 형제들' 중 '대심문관' 이라는 장 입니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 영원히 박혀있던 글이라 이 글을 접하면서 반갑기도 했고요.

글쓴이의 이력이나 자세한 프로필은 알 길이 없지만 '대심문관의'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종교관을

이토록 절묘하고도 쉽게 인용한 것이 놀랍습니다.

그 글을 소개합니다. (필명은 'Farland'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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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불통’… 대결정치 선언

 

민주당은 박근혜 정권을 이길 수 없다

 

 

 

 

 

 

작금 민주당은 야당으로서의 근성도 야성도 다 잃었다. 야당이 야성을 잃으면 유명무실한 것이다. 그들은 말로는 투쟁을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 방법론을 이미 상실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다 잊어먹은 것이다. 그들은 이미 집권에 배고픈 야당이 아니다. 2선, 3선, 4선을 거치는 동안 현상에 안주하는 타성이 몸에 밴 탓이다. 어제 잠시 중계방송 보다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다. 회의장 앞 도로에 육중하고 거대하고 시커먼 국산 최고가의 승용차 두 대가 서서히 회의장 앞으로 서행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충격을 받을 일이 없었다. 최고급승용차를 타는 국회의원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은 언론에서 누누이 보도해서 잘 알지만, 이윽고 거대한 승용차가 멈추고 뒷문이 열리면서 얼굴을 내민 사람은 민주당 의원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유난히 촌스러운 볼품없는 용모에 마치 시장 통의 채소가게 아저씨처럼 마음씨 좋게 생겨 평소에 호감을 느끼던 인물이었다. 세습 재벌 집 자동차공장의 플래그 쉽 이라는 그 거창한 차의 가격은 억 소리가 나는 가격대이고 연비가 장난이 아니어서 거저 줘도 서민들은 운행할 수 없는 등급에 속한다. 그 장면을 본 순간 그들이 장외투쟁을 하는 둥 마는 둥 한다는 비판을 받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만사 다 원인이 있어서 현상이 있는 것이다.

 

 

 

 

 

당의 활로를 찾아야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청와대에 구걸하다 시피 하여 겨우 마련한 회의장에 모인 민주당 의원들은 흡사 파티에 참석한 신사들 마냥 만면에 웃음을 띠고 짐짓 여유로웠다. 만근의 짐을 진 듯 무거운 어깨와 긴장한 얼굴은 오직 김한길 대표 한사람 이었다. 나는 그 장면까지 보고 TV를 꺼 버렸다. 그 결과는 보나마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된장찌개를 하루 이틀 먹어봤다고 손가락으로 찍어봐야 된장인지 아는 것은 아니다. 김한길은 기세가 등등한 대 심문관 앞에 선 힘 빠진 예수의 몰골이었던 것이다. 하루 이틀 앞의 상황도 예측을 못하는 그는 이미 대통령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현존하는 권력인 대통령과 맞장을 뜨겠다고 날이 가고 달이 가도록 졸라댔으니 그는 얼마나 미련한 곰탱이 인가?

 

 

 

 

 

1,500년 만에 예수가 인간들의 나라에 재림하였다. 자신이 가르치고 제도한 인간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민중들이 예수에게 달려들어 따르자 대심문관(교회권력)은 부하들을 시켜 예수를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하루를 거르고 다시 밤이 되자 대심문관은 등명(燈明)을 들고 깜깜한 감옥 문을 열었다. 그새 초췌해진 예수가 긴장되고 처량한 몰골을 하고 거기 있었다. 대심문관은 1분여동안 물끄러미 예수를 쳐다 보고나서 입을 열었다.

 

 

 

“네가 예수냐?”

 

 

 

예수는 입을 굳게 봉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다시 대심문관이 입을 열었다.

 

 

 

 

“대답은 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가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이냐? 네가 할 말은 이미 1,500년 전에 다 했느니라. 그런데 넌 우릴 방해 하려고 다시 왔지? 네가 진짜 예수인지 가짜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나는 너를 재판에 회부하여 극형에 처해지도록 할 것이다. 이교도라는 죄명으로 불에 태워 죽일 것이다. 너는 지금 네 자신을 모른다. 세상이 바뀐 것도 모르고 이제 와서 다시 재림 한다면 네가 다시 하느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했느냐? 하느님은 이미 교회에 계시느니라. 이 감방에 거울이 없는 것이 유감이구나. 네 몰골을 보아하니 참으로 한심 스럽다. 엊그제 너를 따라 다니던 민중들은 네가 화형에 처해지는 순간 내가 눈짓만 깜박 해도 너를 태우는 불길에 숯을 던져 넣을 것이다. 넌 그걸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일단 말을 끝낸 대심문관은 다시 일 분 여 동안 예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예수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예수야, 너는 민중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어 주기를 바랬지? 자유로운 선택이래야 진정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겠지. 그래 너는 자유를 소중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가르쳤다. 하지만 너의 바램과는 달리 민중은 자유를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렵게 사는 자유보다 수월하게 사는 속박을 더 바란 것이다. 그래 교회에선 네 이름을 빌려 민중들을 속박하고 그 대신 질서와 안정을 주었다. 말하자면, 우리교회에 순순히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안정을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가혹한 형벌이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교회왕국은 완성된 것인데, 너는 뜬금없이 왜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냐? 교회의 품 안에서 안정되어가는 민중들을 부추길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말아라.”

 

 

 

잠시 숨을 돌린 대심문관은 다시 예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예수야, 들어봐라. 네가 만약에 사탄이 시키는 대로 돌을 빵으로 만들었더라면 이 지구상의 모든 민중이 너를 따랐을 것이다. 사탄이 너를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하려 할 때 네가 실제로 뛰어 내려서 천사들이 너를 받아 고이 지상에 내려놓는 기적을 보였더라면 이 세상의 모든 민중은 네 발아래 엎드려 경배 했을 것이다. 너는 그 모든 민중의 희원(希願)을 거부하고 고지식하게 ‘나를 시험하지 말라’는 씨도 안 먹힐 소리나 늘어놓으며 민중을 실망 시키고는 유다에게 밀고 당하여 속절없이 제사장의 군대에 잡혀가 십자가를 지지 않았느냐?”

 

 

 

 

 

“너는 민중에게 사랑과 박애 그리고 평등 따위나 가르쳤지만, 우리 교회는 그들에게 빵과 생활의 안정을 약속 하였느니라. 인간은 원래 무기력하고 천박한 존재인 까닭에 태생이 자주와 자유의 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네가 가르친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냐. 우리는 빵과 안정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질서와 복종을 요구 하였다. 민중은 이를 받아 들였다. 물론 빵은 민중들이 만든다. 우리는 다만 이를 합리적으로 분배해 줌으로서 그들에게 빵을 해결해 준 것처럼 꾸밀 뿐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행복을 주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파악한 것이다.”

 

 

 

 

 

 

대 심문관은 인간을 읽고 민중을 다룰 줄 알았다. 이렇게 해서 지상의 왕국이 탄생하게 되니 바티칸에 그 터전을 잡았다. 일단 왕국의 터전을 잡은 이상 그 교권은 절대적 권위를 가져야 했다. 인간을 불태워 죽이는 극악한 형별이 생긴 것은 교권을 유지하기 위한 절대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종교재판은 교회의 권위를 위한 절대 필요한 제도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따라서 절대적인 교회의 권위가 그 기적을 대신 한 것이다. 수억의 인류를 위해서 수만의 인간들이 근 100년에 걸쳐 종교재판으로 불태워져 죽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진 참혹한 실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서 그 어디에서 참혹한 종교재판을 승인하는 구절은 없다. 그 비슷한 구절도 없다. 결국 교회권력을 위해서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한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저지른 참혹한 역사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도스또예프스키가 그의 작품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입을 빌려 한 대 심문관이라는 장을 대강 정리한 것이다. 이 장에서 예수는 이름은 이름대로 교회에 팔리면서 오히려 대심문관에게 철저히 조롱당하고 유린 된다. 자신의 이름이 걸린 교회권력의 생성과 본질을 아는 순간 예수는 땅속으로 그대로 꺼지던가 빛의 속도로 하늘로 승천해 버리고 말아야 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정치권력,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을 하겠다는 민주당의 코메디 같은 몰골이 너무도 한심하여 이 짧은 글을 올리는 심정은 착잡할 뿐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민주당 지도부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름 먹는 하마인 거대한 승용차 에쿠스 4500cc 나 타고 다니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이 정권을 상대로 투쟁을 한다기에 답답한 마음에 하는 소리다. 국회의사당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데를 오면서 으젓하게 대형승용차 뒷좌석에서 폼을 잡는 민주당 당신들이 무슨 투쟁을 한다는 것인가. 미국의 의사당 본관과 주차장은 일반 도로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떨어져 있다. 의원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대 도로변에 있는 의사당 건물까지 한참을 걸어서 간다. 엉덩이에 뿔 부터 난 못난 송아지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