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좌파, 종북 그리고 영감님
멋모르는 어린 시절 '빨갱이' 라는 말을 참으로 자주 들었다.
부모와 이웃들, 선생들로 부터...... '반공'이라는 말도......
이 '빨갱이'는 어린 시절 뿐만 아니라 청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뒤에도 숱하게 귓가를 스치는 원색적 단어였다.
중년기를 지나자 이번에는 '좌파'라는 말이 범람했다.
진보니 보수니, 꼴통보수, 우파라는 말도 같이.....
생각해 보면 '빨갱이'라는 말은 너무 '품위'(!)가 없어 '좌파'로 불리워지고, 요즘은 '종북'이라는 거나한 말로 발전된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단어들의 발전사(!)를 보면 '원색적'에서 '포괄적'으로, '포괄적'에서 '좁은 범위'로 진행되었는데 요즘의 추세로
본다면 다음 버젼에는 어떤 말들이 생겨날까?
우리 사람들은 상당히 정치적이다.
어제, 이웃으로 이사오는 70대 초반의 영감님이 집으로 놀러 오셨다. 혼잣말 처럼 "아이고 어찌나 섬뜩하던지 원...... 시설을 파괴
한다질 않나, 총을 구입해야 한다질 않나, 세상이 어찌될려고 이러는지 원!"
영감님은 그 연세에 흔치 않는, 젊은시절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신 '학문적 엘리트'다.
최근 소위 '이석기 의원의 전쟁준비 발언'을 국정원에서 '요놈!' 하고는 '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회에 들이닥쳐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고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체포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태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는 무심코 '저는 생각이 조금 다른데요' 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영감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마치 '요 녀석도 빨갱이 아냐?' 하는 투다.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이 빨갱이 라는 단어에 대한 섬뜩함(!)은 나 역시도 이 나이에 움추려든다.
"제 얘기는 그 이석기라는 국회의원이 살짝 돈 녀석이라는 생각이고, 그 회합에 모여 총이 어쩌고, 유류시설 파괴 어쩌고 하는
한심한 녀석들의 모임을 옹호하자는게 아니라, 80년대 부터 소위 의식화를 통한 반정부 분자(그땐 내놓고 독재를 하는 시절
이었으니 어느 정도 용인(?)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들이 회합을 갖게 되면 서로가 투쟁적인 선명성을 부각하느라 되지는 않는
발언을 내지르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웃기지도 않는 어린애 장난같은 얘기이고, 그들의 그런 견해에 공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하필 이 시점'에서 그 어마어마한 '내란음모'라는 타이틀을 걸고 국정원이 움직이는것이 하도 딱해서 하는 말입니다.
몇년동안 은밀히 내사해 온 조사내용을 왜 이 시점에서 터뜨릴까요? 국정원 개혁을 부르짖는 촛불모임이 연일 열리고 국정원장
퇴진을 요구하고, 대선에 개입하여 치졸하게 구석방에 앉아 인터넷 댓글이나 두드리고 있는 국정원의 꼴사나운 행태를 성토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말입니다.
마치, '이것들이 까불래? 한번 죽여주랴!' 하는 것 같다는 얘깁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국정원이라는데가 간첩을 색출하고 해외 정보를 수집하고, 기업의 국익관련 누출을 막고, 국가안보를 위해 음지
에서 일한다는 곳이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 어떤 이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구석방에서 댓글이나 달고 있는, 요샛말로 찌질한
짓거리나 하고 있다면 당연히 개혁 요구를 받을만 하지요. 더구나 얼마전에는 국정원이 댓글 사건으로 곤욕을 치루자 공개가 위법
이라는 남북정상 회의록을 제멋대로 공개해서 난리를 떨지 않았습니까.
이건 뭐 하도 웃기는 짓들을 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생각이 영감님과 조금 다르다고 표현한 것이니 오해 마세요"
이런 얘기를 해 드려야 할 것 같다. 아, 힘들다.......
어느 나라건 좌파적 관념을 지닌이도 있고, 우파적 관념을 지닌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일부는 서로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토론하고, 입안하고 미래를 위한 참고자료로 활용하기도 할 것이다.
도무지 이 나라에선 그러한 개인적 이념이나 관념을 공개적으로 발설하기가 게름칙 하고 '이거 뭐 나중에 어떤 녀석이 죽창이라도
갖고 와서 등을 찔러대는건 아냐?' 하는 따위를 걱정해야 한다는, 참으로 찌질한 나라가 아닌가.
영감님은 부족함 없이 세상을 살아오신 것 같고, 앞으로도 안락한 삶이 보장된(잘은 모르겠지만) 비교적 풍족한 분이니 평등과
분배를 요구하는 좌파가 마뜩찮을게고 그런 집단적 세력의 태동을 두려워 하시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70년을 넘게 살아오시면서 한번도 '평등'이나 '분배'나 '복지'를 생각해 보시지 않았을리 없는데.......
하긴 그것에 무관심 하시기 보다는 '좌파'의 준동과 '빨갱이'로 의심되는 세력의 태동이 두려우신게지.
그런데, 그건 그렇고 이 나라는 계속 이런 꼬락서니로만 갈 것인가?
새까만 양복입고, 하얀 와이셔츠, 윤이 나는 구두를 반듯하게 차려입고 세련된 매너로 무장한 국가정보원이라는 기관의 장정들이
기껏 컴퓨터 댓글이나 올리고, 그들에 못지않게 찌질한 인간들의 뒷꽁무니를 쫒고, 몰래 녹음하고선 자신을 헤꼬지 하려는
녀석들이 준동하면 '이 자식들아 죽어볼래?' 한다면...... 참으로 한심하다.
그것이 개인이 아니고 '국가'라는 체제라면 더욱 우스꽝스런 노릇이 아닌가.
어떤땐 외국 사업가들이 묵고 있는 호텔방에 몰래 들어가 컴퓨터에 들어있는 자료를 훔치다가 그것도 '찌질하게' 들켜서는 국제적
망신을 당하질 않나....
이런 인간들에게 세금내고, 세상사 우위에 있는 인간으로 대접해 주다니 이 나라 사람들이 너무나 초라하다.
철없는 몇몇 인간들이 모여서는 '야! 우리 세상을 한번 뒤집어 엎어버리자!' 고 토악질 하듯 부르짖는 인간들은 어느 측면에서
보자면 끝없는 피해의식에 의해 그런 짓들을 하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쟁이 나면 (전혀 그럴 일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나라를 주름잡는 굉장한 우익들이 식칼과 몽둥이를 들고 일제히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불안을 항상 가지고 있는건 아닐까? 이런 생각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자본주의가 이제는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 라는 말로 포장되고 있는 이 시대가 과연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최근의 영화 '엘리시움'은 1% 정도의 부자들이 오염된 지구를 떠나 우주에 낙원을 만들어 완벽한 의료체계, 풍족한 물질, 쾌적한
환경속에 살아간다. 99%는 오염되고 모든것이 부족한 지구에 남아 어렵게 살아가는데, 어느날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주인공이 1%가
사는 엘리시움으로 가기위해 악전고투 끝에 결국 엘리시움의 '이기적 메인 프로그램'을 '더불어 살아가는 프로그램'으로 수정한 뒤
죽는다는 황당한 SF 영화인데 근래 상영된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등과 함께 '계급'을 모티브로 한 영화들이라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이런 요즘의 영화들이 많은 사람들로 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데에는 이런 '자본주의 시대의 몰락'의 징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지만 '단번에 세상을 갈아 엎겠다'든지 '단번에 이런 질서를 무너뜨리겠다'는 데엔 공감할 수 없다.
'단번에' 때문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던가. 히틀러가 그랬고, 나폴레옹이 그랬고, 알렉산더가 그랬고, 폴 포트가 그랬다.
폴 포트는 '썩은 사과는 상자째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이 학살자들은 공통적으로 '단번에!' 라는 명제에 골몰했던 인간들이다.
마치 천년은 살 것처럼 세상의 질서를 재단하려들고 망치로 깨부수려는 인간들은 모두 실패했다. 결국 그들은'살육자'들이었던
것이다.
우파든 좌파든 세상은 '자연적' 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인류역사도 결국은 '자연적'이고 세상의 변화도 '자연적'인 것이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개조하려 하면 안된다.
'세상엔 하지 못할거라고 하는 이가 있고, 그것을 하는 이가 있다' 는 따위의 경구를 신봉하면 곤란하다.
하긴, 히틀러의 출현도, 나폴레옹도, 알렉산더와 폴 포트도 '자연적' 발생이었다면...... 할 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