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에 대한 단상(퍼온 글)
요즘 설국열차가 공전의 히트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도 내용이 궁금해서 늦은 밤에 집사람과 함께 봤는데
같이 본 집사람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고 하는 것을 보아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나름대로 매우 재밌게 봤거든요!
영화를 보면 느낀 부분들을 중심으로
지금의 경제 상황과 연결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스포가 있으니 영화 보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일단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메시지가 강한편이라
드라마적 관점에서 장면 전환이 매끄럽지 못할 때가 있고
때로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메시지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뛰어난 감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영화도 첫눈에 들어오는 계급구조와 그 내부의 갈등,
생존을 위해 앞 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진행을 목숨을 걸고 막는 사람들,
그리고 시스템의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설계자의 고민,
거기에 시스템 밖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치 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주며
그 계급구조 속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고민과 갈등,
그리고 시스템 유지와 전복이라는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지요.
물론 다양하게 고려된 영화적 장치에 대해 많은 해석들이 있고
특히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도 해피엔딩이다 아니다
설왕설래 상반된 주장이 있지만
봉준호 감독이 일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혁명가 커티스와 관객들이 윌포드의 논리에 설득되기를 바랬다고 말한 바 있고,
또 영화 스토리상으로도 남궁민수(송강호)로 인해 기차가 탈선하고
두 명의 아이를 제외한 기차의 모든 탑승객들이 죽은 것은
일단은 비극적 결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일단 송강호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한 분들이 많으실 것이고
송강호가 주연이 아니란 점 때문에 실망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극중 남궁민수(송강호)는 단지 꼬리칸 사람들에게 앞 칸을 열어주는
단순한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커티스와 함께 모든 고된 과정을 거처 엔진 칸에 도착했을 때
지난 17년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시도하여 실패했던
가장 무모해 보이는 바깥 세상으로의 탈출이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커티스를 설득하는
극 전개상 가장 핵심적인 인물입니다.
결국 앞 칸을 향해 나아가던 영화의 진행은
송강호의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 기차의 탈선과
시스템의 종말이라는 갑작스런 결말로 마무리 됩니다.
..
전체적인 스토리를 간단히 정리하면
커티스는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꾸고 싶어 했고
윌포드는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에 모든 것을 집중했고
남궁민수는 그 시스템의 탈출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각자 나름의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수많은 기차 칸의 한 부분에서 태어났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대다수 사람들은
꼬리 칸에서 태어나 꼬리 칸에서 죽을 운명이지요.
결론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앞 칸 사람들에게 위탁한 채
그들을 위해 평생 살다가 그들에 의해 정리될 것인지
아니면 되던 안 되든 일단 앞 칸을 향해 돌진해 나가든지
그것도 아니면 시스템의 탈출을 꿈꾸든지
결국 이 세 가지의 선택지 앞에 서게 됩니다.
..
제가 가장 주목해서 본 인물은 바로 남궁민수로
오직 남궁민수만이 시스템 밖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의 대안을 커티스는 받아들일 수 없지요.
정작 그는 기차 밖의 세상을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과거 기차 밖으로 나갔다가 얼음기둥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기차 밖 세상에 대한 공포를 자아냈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공포에 휩싸여 있는 사람에게는
정작 자기 자신이 그 시스템의 가장 하위 구조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하더라도
시스템 자체에 해를 가하는 행위만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흡사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친네들이
구질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시위를 하는 젊은이들을 보고
앞뒤 가리지 않고 빨갱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스템의 안정을 바라는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그들을 끊이없이 착취해온 시스템의 운영자가 아니라
멋도 모르고 시스템을 전복하고자 하는 불순한 무리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평등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좀 더 자비로운 손길일 뿐입니다.
..
남궁민수의 그런 빨갱이적(?)인 사고에 동조할 수 없었던 커티스는
처음엔 이 모든 것이 시스템 유지를 위해서 불가피 하다는
윌포드의 지도자로서의 고민 앞에서 흔들리게 됩니다.
하지만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기계의 부속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모습 앞에서
결국 그는 윌포드 관점에서 가장 비 이성적인 선택에 동조를 하고 말지요.
즉,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비롯 모든 이들에게
끔찍한 비극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앞 칸으로 달려오는 과정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차를 탈선시켜버리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남궁민수의 딸 요나와 한 흑인 아이가 살아남게 되고
영화는 그 이후 세상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남기며 마무리 되지요.
결국 생존을 위해 17년간 매달렸던 설국열차 시스템은
이렇게 허무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
하지만 커티스의 그런 선택이
최악의 선택이었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어찌됐건 설국열차가 영원히 달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안한 균형 속에서 안정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무질서를 만들어 내야만 하는 구조적 한계 때문만은 아닙니다.
설국열차는 전 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철로라는
매우 불안정한 인프라 위에 놓여있기에
언제 어떻게 탈선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기차 자체의 부품을 내부적으로 조달해야 되기 때문에
기차는 기차 시스템이 자체적으로 붕괴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구히 지속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는 시스템이
17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시스템 밖에 존재하는 설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사상은 이미 홉스의 사회계약론에 드러나는 바
시스템 밖의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얼룩진
야만과 비이성이 지배하는 잔인한 세상이기에
시스템 속의 작은 문제점과 부조리는 눈감아 주어야 합니다.
지배자들의 폭력과 착취 또한 어느정도 감내해야만 되는 것이지요.
시스템은 사실상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국열차 속 아이들은
기차가 멈추면 죽는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으며 자라납니다.
그리고 윌포드야 말로 그들의 구세주인 것이지요.
결국 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믿음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고
기차의 지배자인 윌포드에게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
영화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바,
설국열차의 각 칸은 바로 이곳,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나타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는 자본의 유무로 자리가 결정되는 데,
자본 없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노동자들은
설국열차 관점에서는 무임승차한 잉여인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시스템의 유지라는 대의 명분하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유전자 조작 식량을 만들기도 하며
백신에 약을 타기도 하고 하늘에 이상한 물질을 뿌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시스템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하겠지요?
만약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면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시스템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
사실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설국열차와 매우 유사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지요.
그리고 매우 위태로운 철길 위를 질주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나 시스템 곳곳에 균열이 생기고 있습니다.
무임승차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꼬리칸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되고
자본가들은 승차권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분에 넘치는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지요.
또한 매우 강력한 교육 시스템을 통해
시스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여
꼬리칸 사람들은 게으른 잉여인간으로 인식됩니다.
결국 꼬리칸 사람들에게 현실적으로 남은 선택은
운 좋게 앞 칸의 선택을 받거나
아니면 피나는 노력으로 한 두 칸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신의 비참한 삶의 현실을 받아들일지언정
시스템 자체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지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자리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시스템을 그들에게 제시해도
그 새로운 가능성을 진지하게 들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되뇌입니다.
"이 시스템이 쉽게 붕괴되지는 않을 거야!"
"미국과 달러는 영원할꺼야!"
하지만 꼬리칸 사람들이 그러한 자괴적인 생각에 매달릴수록
자신들과 자신의 자식들의 운명은 더욱 더 암담해질 뿐입니다.
좀 더 평등하고 공정한 시스템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지요.
당장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된다?
결국 벌레를 갈아서 만든 단백질 블록이 좋다고 달려드는 꼴입니다.
..
설국열차의 경우 사회의 계급구조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는데,
영화 속에서 무임승차한 꼬리칸 사람들은
기차의 운행에 있어서 대규모 노동을 포함한
어떠한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한된 자원을 소비하는 잉여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사회 계급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다른 영화들은
노동자들이 정작 사회 생산과 시스템 유지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는 비참한 현실에 주목하는 반면
설국열차는 처음부터 꼬리칸 사람들을 아무 쓸데없이
공간만 차지하고 있는 잉여 인간으로 취급합니다.
그들 중에서 사용가치가 있는 인간들은 극소수며
결국 열차의 가용 자원과 앞 칸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꼬리칸 사람들은 생존하게 되는 구조이지요.
그들이 살아남는 것은 그들의 노력과 노동 덕이 아니라
단지 윌포드의 배려 덕분인 것입니다.
이는 철저하게 앞칸 사람들, 즉 지배 계층의 시각을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 줌으로서
설국열차란 영화가 봉준호 감독 말처럼
‘혁명’을 주제로 삼고 있으면서도
‘혁명’을 자극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주제를 알라는 지배 계층의 메시지에
더 큰 힘을 싫어줍니다.
그리고 혁명에 대한 진압을 빌미로 한 살인,
신체를 훼손시키는 잔인한 처벌,
그리고 아동 노동에 이르기까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서는
모두 허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죽기 싫으면 나대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혹은 결국 너희들의 운명은 우리들의 큰 계획 속에 있다!는
지배계급의 메시지가 더 강하게 다가오는 영화이지요.
어쩌면 극중 메이슨 총리가 장황하게 외치는 메시지야 말로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영화 감독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봉준호 감독이
이념적 배신을 한 것일까요?
보통 꼬리칸을 벗어난 사람이 맨 먼저 하는 것이
오히려 꼬리칸을 비난함으로서
자신에게 남아있는 꼬리칸 흔적을 지우는 것인데 말이죠.
아니면 배신을 가장하여 더욱 심층적이고
더욱 강력한 혁명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는 잉여가 아니라!는 내부의 외침을 자극하고자 한 건 아닐까요?
혹시라도 봉준호 감독을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고 싶군요!
..
커티스와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꾼 남궁민수가
환각효과를 일으키는 산업폐기물인 크로놀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크로놀이 단지 탈출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정신이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크로놀에 중독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스템 속의 삶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크로놀은
꼬리칸에서는 매우 소중한 물건입니다.
앞 칸으로 가는 문을 여는 남궁민수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 역시 크로놀입니다.
하지만 남궁민수에게 있어 크로놀은 제정시으로 견딜 수 없는
시스템 속에서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환각제이자
동시에 시스템을 벗어나게 해줄 탈출 도구가 되지요.
그래서 남궁민수는 앞칸으로 가는 여정 속에서 틈만 나면
자신의 탈출을 도와줄 크로놀을 열심히 챙깁니다.
또한 기차에서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 같은 털옷도 챙기지요.
이처럼 크로놀은 시스템 안과 밖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에서의 탈출과 동시에
시스템 자체에서의 탈출을 가능케 해줍니다.
어쩌면 시스템 밖의 세상을 꿈꾸는 남궁민수에게
기차라는 시스템은 견딜 수 없는 갑갑함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결국 그는 크로놀이 주는 환각에 중독되고 말이지요.
어쩌면 영화 속에서 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남궁민수 한사람 밖에 없는 것인데
꼬리칸 사람마저 그를 정신나간 미치광이로 생각하는 모습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시스템 속의 사람들 눈에는 남궁민수가 크로놀에 중독된
미치광이 혹은 사회부적응자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남궁민수의 눈에는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윌포드,
꼬리칸의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고 하는 커티스
혹은 자신의 자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안주하는 인간들 모두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시스템 속의 불쌍한 인간 군상들일 뿐입니다.
..
제가 늘 말씀드리는 현 부채 자본주의 시스템의 특징은
절대로 멈출 수도 그리고 멈춰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의 경제 시스템은 설국열차와 매우 비슷합니다.
현 부채 자본주의 시스템은 오직 기하급수적 성장 하에서만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속도가 줄어드는 것은 시스템 유지 자체에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기존의 속도를 유지만 해도 문제가 생기는 이상한 시스템이지요.
따라서 현 부채자본주의는 일반인들의 희망처럼
영구히 지속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과도한 부채를 정리하고
산뜻하게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지점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쳤습니다.
설국열차가 지난 17년간 아무런 문제없이 달려왔다 하더라도
갑자기 철로가 틀어지면 기차는 그 순간 탈선하게 되어있습니다.
혹은 예상치 못한 눈사태가 덮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7년간 설국열차가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은
시스템의 성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기적으로 보입니다.
..
사실 우리나라만 봐도 가계부채를 해결할 묘안이 없습니다.
부채에 허덕이는 대부분의 선진국들 또한
자신의 부채를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결국 시간문제일 뿐 우리는 그 끝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혹자는 경제 정책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주장은 정치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 가능한 주장입니다.
정치인들은 장기적인 관점의 발전보다는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게 마련이고
미래의 문제는 결국 다음 정치인이 책임일 문제입니다.
자기는 늙었다는 이유로 커티스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주고자 했던 윌포드 역시
어쩌면 커티스라는 후계자를 통해 통해 이미 수명을 다해가는
시스템의 붕괴에 대한 짐을 벗어버리고자 했을런지도 모르니다.
대다수 국민들 또한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만들었던 상관하지 않고
더 값싸고 맛있는 단백질 블록만 얻을 수 있으면 그만이지요.
운 좋게 크로놀을 얻게 되어도 단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일 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시스템의 유지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기차의 탑승자들은 기차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과 범죄에 대한 공범인 것입니다.
따라서 커티스는 자신의 팔 하나를 내놓는 것으로 자신의 죄책감을 모두 떨구지 못합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던 가장 비밀스러운 욕망,
즉 윌포드 처럼 시스템을 통제하고 싶었던 은밀한 욕망에 대면했을 때
그 욕망을 전면 부인함으로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
지금 전 세계 경제는 여전히 절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위기의 목소리들이 줄어들고 그 잔향마저 수그러들었지만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지 않은 이상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또한 당면한 문제를 뒤로 미룬 이상 다가올 문제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2008년 세계 경제 대혼란의 위기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 해결 없이 미루고 미룬 위기가 더 큰 공포가 되어 다가올 경우
그 혼란은 2008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
현재 전 인류는 전대미문의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거대한 실험이 일부 예언가들에게는 인류 종말의 서막으로 비춰지겠지만
어쩌면 영화 내용에서 암시된 것처럼
시스템 설계자들의 입장에서는 리젯과 인구감소를 통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된 혼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혼란 가운데서 어떠한 삶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우리들의 선택이고
결국은 크로놀을 어디에 쓸 것인가의 문제겠지요?
그래서 환각 용도로 쉽게 쓸 수 있는 짝퉁 크로놀이 아니라
이왕이면 품질 좋은 진짜 크로놀을 준비해 두라는 말씀을 늘 드려왔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진짜 크로놀이 불필요하게 비싸고 불편하다고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운명의 순간 짝퉁 크로놀과 진짜 크로놀의 가치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다만 크로놀 자체에 너무 집중하면 크로놀이 주는 환각작용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테니 항상 주의하셔야 하겠지요?
..
현 시스템에서 골드 버그는
크로놀 중독자를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시스템 전복을 위한 버그가 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진정한 크로놀은 금과 같은 실물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우리의 용기,
어쩌면 자신의 욕망 앞에 솔직할 수 있는 우리의 양심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혹시 각자가 찾아야만 되는 삶의 의미일 수도 있겠지요?
출처 :생존21c - 지진,재난,재앙,대공황,전쟁,사고로부터의 생존스쿨 원문보기▶ 글쓴이 : 비빔밥(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