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3월 19일 (케린보드)
아침, 산책을 다녀오니 호텔 옆 공터에는 '케린보드' 판이 벌어져 있다.
케린보드란 인도나 네팔에서 공히 성행하는 서민 대중(주로 젊은 층)의 놀이인데, 허리 높이의 가로 세로 1미터가 좀 넘는 판에서 직경 2-3센티미터의 플라스틱 둥근 조각을, 네모난 판의 귀퉁이 구멍에 손가락으로 튕겨서 넣는, 말하자면 미니 포켓볼 게임이다.
판 위에는 플라스틱 조각이 잘 미끄러져 튕겨 가도록 흰 파우더를 뿌리고 손가락의 검지나 중지로 튕겨서 판 위의 모든 플라스틱 조각이 네 귀퉁이의 구멍에 들어가도록 해서 먼저 끝내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듯 했다.
가히, 카트만두는 이 케린보드의 열풍(!)에 휩싸여 있고, 포카라의 외국인 밀집지역인 레이크 사이드와 댐 사이드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으나 그 인근을 벗어나면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언제부터 이 게임이 이 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는지 알 수는 없으나 카트만두의 골목마다, 대로변의 집 모퉁이마다 설치되어 있고, 의례 7-8명, 혹은 5-6명의 '게이머'들이 붙어 서있다.
처음엔 이 케린보드 열풍이 젊은이들을 매료시켜 일 할 생각을 않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일자리가 없는 젊은이들이 소일하고자 이 케린보드가 있는 것이다.
우리네처럼 무슨 '방', 소위 PC방, 비디오방, 게임방, 황토방 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들여 극장엘 드나들 형편도 아니니 이들은 거의 대부분 돈 들지 않고, 작은 공간과 아무 곳이나 설치가 가능한 이 케린보드 옆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나마 부모의 지원이든, 자신이 아르바이트로 모았건, 조금 여유가 있는 젊은이들은 오토바이 열풍이다. 워낙 오토바이가 이 나라의 주요 교통수단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젊은이들의 오토바이 선망도 또한 대단한 것 같다. TV에서 방영되는 거의 대부분 뮤직 비디오 등 프로그램에서 오토바이는 주요 출연 소품인 점이 이를 말한다.
어쨌든 네팔의 젊은이들은 절대적으로 일자리가 없는 것 같다. 하긴, 여행사에서 정식으로 소속된 가이드나 포터중 과반수가 대졸 출신이라 하니 이들의 일자리는 대충 짐작할만한 것 아닌가.
길거리에서 케린보드가 점차 사라질 때 네팔의 젊은이들은 비로소 제 밥벌이를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누가 알랴. 그런 날이 언제 올지...... 내가 보기엔 아직 한참 뒤의 일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마오이스트가 주도한다는 번다(강제 총파업)가 최근에 와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시행되고 있지만, 카트만두나 포카라 외곽, 시외로 빠져 나가고 들어오는 장거리 버스의 통행이 불가한 정도이고, 국내선 비행기는 여전히 운행되고 있어, 체류중인 외국인이 크게 불편한 점은 없지만, 여행을 계획한 외국인의 유입이 현저히 줄어들고, 지방을 오가며 장사하는 서민들이나, 물자운송 등은 큰 장애가 되고 있는데, 이런 잦은 번다에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하는 우리식 '궐기대회' 같은 것은 없었다.
번다 또한 그들의 일상이 되어버린 느낌이고, 언젠가 풀릴 장애이므로 그것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며 기다리는 것이다.
도무지 그들에게는 초조함을 찾아볼 수 없다.
포카라의 주요 경제수단인, 외국인을 상대로 한 호텔과 레스토랑은 이 번다로 인해 엄청난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으나 이들의 얼굴은 항상 평온, 그 자체다. 하긴 속내로야 왜 불만이 없겠는가. 다만 그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찾아낼 재간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네 같으면 얼굴에 단번에 표출되는, 익숙한 표정을 그들에게서는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트래킹때 인도에서 대학을 다닌 포터 치린에게, 괜한 객기를 부려 물어본 적이 있다.
"너희 나라에 마오이스트 들이 있다며?"
"응."
"그 사람들은 왕정을 종식하자고 있는 거냐?"
"......"
"그 사람들은 진짜 공산주의자들인가? 아니면 반정부 투쟁을 위해 설쳐대는 단순한 무장단체인가?"
"......"
"그 사람들과, 지금의 정부가 다른 점이 뭔가?"
"쎄임 쎔!"
무엇이 같다는 건가? 모르겠다. 내가 외국인이라 유쾌하지 않은 자기네 복잡한 정정(政情)에 대해 설명하기 싫은 걸까? 아니면 외국인의 금기사항인 자기내 국내 정치문제를 묻는 내게 '너희나 잘 하세요!'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한심한 영어를 구사하는 내게, 디테일한 설명이 불가함을 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 모두가 똑 같은 그룹임을 자조적으로 암시하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오늘도 케린보드 앞에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다. 오늘 옮긴 호텔의 마당에도 아침에 케린보드를 설치하고 호텔 종업원들과 인근 레스토랑 종업원들이 평화롭게(!)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