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3월 15일 ('아즐'에 대하여)
오늘은 사랑콧(Sarangkot)에 미니 트래킹을 다녀오려 했으나 아침 날씨가 좋지 않다.
포카라 시내에 붙어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 1,592미터의 사랑콧은 포카라를 멀리서, 그러나 장대하게 감싸고 있는 설산들의 연봉사이를 훼방하듯 버티고 있어, 이 훼방꾼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야만 거침없이 마차푸츠레, 다울라기리 등 연봉들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조우를 아직까지 아껴두고 있는데, 아침의 날씨가 찌뿌듯하면 모처럼의 조우는 망쳐지기 십상인 것이다. 오후에는 거의 90%는 구름이 몰려오므로 아침 일찍이 아니면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빈둥댈까? 아니면 자전거라도 빌려 타고 외곽 나들이라도 해 볼까?
우선 아침식사를 간단히 해결하려고 호텔 옆의 빵집에 갔다.
"이 빵 두 개하고, 저것과 이것 한 개씩 줘."
"먹고 갈 거야?"
"응."
"......" (빵을 꺼내지도 않고 빤히 날 쳐다보는 가게 아가씨)
"왜 안 줘?"
"먹고 갈거냐구?"
"두 개는 여기서 찌아하고 먹고, 두 개는 갖고 갈 거야."
그제야 그녀는 빵을 꺼낸다. 내 딴엔 인상 좋은 한국인으로 보이려고 웃으며 얘기한 것이, 아침부터 자기에게 농을 거는 것으로 여긴 것 같다. 왜냐하면 한 개의 크로와상과 한 개의 치킨 빵 등 두 개를 먹고 나니 배가 부른데, 내가 먹고 있는 사이에 백인 네 명과 일본 젊은이 두 명이 왔는데, 그들 모두 한결같이 한 개의 빵과 한 잔의 찌아, 또는 주스를 마시고 나갔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렇게 많이 먹는 이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 처음에 네 개의 빵을 먹고 가겠다고(그녀의 지레 짐작으로) 하는 내게 그녀의 반응이 심란할 수 밖에......
어쨋든 여기는 적어도 독신자가 생활하기에는 그저 그만이라는 생각을 잠시 한다. 아침에 빵 한 조각에 마실 것 한 잔. 저녁엔 120루삐 파이 한 조각과 맥주 한 잔. 먹을 것에 관해서는 여기는 그야말로 천국이다. 맛있는 각국의 요리가 있고, 경쟁적인 서비스, 얼마든지 골라 먹을 수 있는 각양각색의 음식점들. 그러나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무지 싸다는 것이다. 이 싼 가격의 음식들이 언제까지 유지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제 저녁에는 이곳에서는 흔하다는 기습적인 우박을 경험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미네가 호들갑을 떨어 나와 봤더니 우박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호텔마당의 파란 잔디밭은 콩알보다 큰 우박으로 순식간에 하얗게 뒤덮여 있었고, 어두운 하늘은 계속되는 뇌성과 함께 나이트 클럽의 오두방정 조명처럼 난리법석이다.
우박은 약 15분간이나 쏟아졌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내리는 우박도 처음이거니와 그렇게 많은 우박도 처음이라, 사실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하늘은 연방 쩍쩍! 번쩍대며, 집 밖으로는 아예 한발짝도 나올 생각일랑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윽박지른다. 아무렴, 이럴 때 나갈 얼빠진 친구가 어디 있을라구.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거야, 그럼!
우리는 방안에서 창밖을 응시한 채 한동안 기죽어 있었다. 나중에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니 이곳에선 자주 있는 일이란다. 하긴 우박이 그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지 한 시간 정도 지나자 갑자기 조용해져 하늘을 보니 별이 몇 개 반짝이고, 구름이 얇게 흐르고 있다. 참 재미있는 날씨다. 포카라는......
컨디션 저조의 미네를 혼자 두고 호텔 앞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이쁜 여자 있나 잘 찾아봐요!"
하긴 이 동네는 혼자 온 여자, 혼자 온 남자 천지다. 충분히 미네가 저런 소릴 할 소지가 있는 동네다. 레스토랑에서 몽롱한 눈을 한 채 하릴없이 담배피고 있는 백인여자가 있는가하면,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듯 한 몰골로 찌아 가게에 혼자 앉아있는 황인종 남자들이 부지기수다.
지네들 나라 골목 한 귀퉁이에 혼자 앉아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음...... 이곳은 분위기가 좀 그렇다. 나만 그런 수상한 마음을 먹고 있냐고?...... 아니다. 미네의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는 그런 묘한 분위기를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다. 뭐, 그렇다고 어쩌랴. 가벼운 수작을 걸어본다고 해도, 적어도 잉글리쉬가 자연스러워야 될 것 같고, 가벼운 유혹을 당해 본다 해도 역시 잉글리쉬가 자연스러워야 괜찮은 추억 하나 만들어보겠지만...... 음, 불가능해. 단념하자. 오히려 젠틀한 한국남자로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울 거야. 아무렴!
자전거는 한 시간에 15루삐, 영감님은 동양인에겐 역시 높은 안장을 낮춰주고 열쇠를 잠그는 요령을 설명하곤 "어디서 묵고 있어?" 하고 묻는다. "저기 글래이셔." "오, 그래. 노 프러블럼!"
도대체 자전거를 타 본적이 언제던가. 어쨋든 비틀거리는 자전거로 댐 사이드 쪽으로 갔다. 댐 사이드는 이곳 레이크 사이드 보다 상권(商圈)이 훨씬 좁다.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도 적고, 당연히 레스토랑도 얼마 없다. 그래서 레이크 사이드와 달리 주택가와 상권이 뒤섞여있다. 네팔리들의 삶과 밀착된 경험을 원한다면 어쩌면 댐 사이드가 더 나을지 모르겠다.
댐 사이드는 말 그대로, 페와 호수의 물을 가둬두는 소규모 댐이 있는 곳인데, 오히려 레이크 사이드 쪽의 호수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 레이크 사이드의 호수 주변은 상가에 완전히 점량되어 호수로의 일상적인 접근이 어렵다면, 댐 사이드는 접근이 쉽고, 시야에도 가까워 경관을 즐기기엔 그만이다. 다만 댐 사이드는 호수에 면한 지역이 좁아, 상권이 다양하고 넓게 형성되기에는 한계가 있는 듯 했다.
어쨋든 거의 한 시간을 채우고 자전거를 돌려주려고 영감님에게 돌아 왔을 때 영감님 주변은 젊은 일본여자애들 5-6명이 에워 싸고 있다. 아직 요금을 지불치 않았으므로 자전거를 세워놓고 내게 시선 주기를 기다렸으나, 영감님은 그만 이 젊은 여성들에게 마음을 뺏겨버렸다. 안장을 내려주고, 또 닦아주고, 치마를 이렇게 여미고 타라, 어쩌고 하면서...... 보아하니 근래에 드물게 마음이 들떠 버린 것 같다. 게다가 일본 젊은 여성들이 자기네끼리 그 애교 섞인 웃음까지 흩뿌리니, 허구한날 자전거 7-8대 세워두고 하품하며 지내던 영감님은 오랜만에 희색이 만연하여 나 같은 중늙은이의 존재가 뵈기나 하겠는가. 으음...... 역시 젊은 여성은 파워 풀 해!
간신히 영감님의 시선을 얻고는 15루삐를 지불하고, 그 열정의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이 메일을 보내고 싶은데...... 해서 몇 군데 PC방엘 들렀으나 한글 키보드가 없다.
"코리언 키 보드 있어?"
"있지, 노 프러블럼."
"어디?"
PC에는 한글이 입력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었지만 한글이 인쇄된 자판은 없다. 당연히 우리 같은 중늙은이의 독수리 타법(독수리 타법치고는 꽤 빠르다고 자부하지만)에는 어째 께름칙하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키보드를 눈으로 보지도 않고 두 손으로 능숙하게 두드려대지만 우리야 어디 그런가?
답답한 양반들! PC방의 여러 대중 한 대 정도는 키보드에 한글을 인쇄해 두거나, 아니면 키보드 먼지덮개 비닐에 한글을 기록해 두면 우리 같은 독수리 타법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하긴 뭐, 나 같은 중늙은이가 네팔의 카트만두나 포카라에 와서 인터넷을 검색하고, 이 메일을 보내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은근히 부화가 나서 대여섯 군데를 '코리언 키보드?' 하면서 기웃거리다가 그냥 돌아와 버렸다.
세상은 항상 '올드'보다 '뉴'에 관심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지만 '올드'에도 관심을 좀 가져주면 안될까? 음...... 안 되겠지?
'아즐'에 대하여......
네팔에서 가장 매력적인 말은 단연 '아즐!'이었다. '아즐'이란 우리네 말로 그냥 간단히 "예!'이다. 그런데 이 흔한 말이 정말 매력적이고, 앙증맞고, 네팔인 들이 들으면 불쾌해 할진 모르지만 내겐 귀여운 어휘였다.
누군가 뒤에서 부르면 '아즐!'하고 뒤돌아본다. 전화를 받을 때 '알로, 아즐!(헬로우, 예! 예!) 하는 그들의 말을 들을 때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계속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을 정도다.(물론 나머지 말들은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네팔인 들은 그들의 교육체계 때문인지 대부분 일상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한다.
30-40대 젊은층은 거의 80%가 영어로 간단한 대화가 가능한 것 같고, 노년층은 70% 정도가 하지 못한다고 들었지만 이건 뭐, 확실한건 물론 아니다. 대충 그렇다는 것이다.
어쨋든 이들은 영어에 관한한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예를 들자면, '투엔티 파이브 루피'를 '뚜엔띠 빠이 루삐'로 발음 하는 등, 발음이 좀 세고, 미네의 표현에 의하면 데굴데굴 굴러 가는듯한 영어라 귀를 쫑긋 세우고 듣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콩글리쉬맨인 우리에겐 인도 요기의 주술같이 들리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네팔인들의 대화 자체가 앞서 비행기 기내에서의 대화를 언급했지만, 상당히 로우(Low) 레벨이어서 듣기에 부담스럽지 않고, 당최 싸우는 일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톤이어서 우리네 경상도식의 저돌적이고 다소 위압적인 톤이나, 전라도식의 카랑한 톤에 익숙한 나로서는 이들의 대화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즐거이 경청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말 중 '아즐!'은 단연 최고의 매혹적 발음이다.
"어이, 치린!"
"아즐!"
"저기 저 소금 통 좀 줘."
"아즐!"
재미있다. 미네와 자주 있는 의견충돌 때, 음! 이걸 써먹어야 겠다.
"이봐요! 도대체 당신은 그걸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즐!"
재미있지 않겠는가. 뭐 네팔인이 듣는다면 '별 희한한 녀석이 다 있군. 남의 대답까지 코미디에 써 먹을랴고 하다니 한심한 녀석이군. 그렇지 않냐고?'
"아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