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3월 13일 ('올드'는 '뉴'에 먹힌다)
몸이 아직 개운하지 못하다.
햇빛은 눈부시고 공기는 청명하다. 포카라 다운 날씨다. 호텔의 마당을 빗질하던 여자들이 밝게 인사한다. 네팔리들의 인사성과 보기 좋은 웃음은 정말 알아줘야 한다.
꽃은 이곳 특유의 진한 색깔을 띄고 있고, 마치 형광물질을 바른 것 같이 눈부신 것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네 꽃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네 꽃과 비슷한 것이 많고, 어떤 것은 같은 종류(코스모스, 화련 등)도 있지만 더 진하고 더 밝게 빛난다. 아마 아열대 지방의 기후와 우리와 다른 토양 탓이 아닌가 생각 되지만 나로선 알 수 없다.
어제 정원사가 옮겨 심던 모종이 아침에 싱싱하게 대지의 기운을 빨아올리고 있다. 호텔은 지독한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지만 종업원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다. 하긴 네팔리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표정을 보기란 쉽지 않다. 혼자 가만히 있을 땐, 그들 특유의 우수가 있는 얼굴이다가도 대화를 나눌 때나, 처음 보는 사람과 인사를 할 때는 밝고 환한, 그러면서도 순박한 표정이 얼굴 가득 번진다. 참 기분 좋은, 정감있는 사람들이다.
꽤 괜찮아 보이는 125cc 오토바이가 한 대 마당에 놓인 채 '빌려 줍니다'라는 표찰을 달고 있다. 이 호텔에 손님이라곤 우리밖에 없는데, 어제부터 세워둔 걸로 봐선 날더러 빌릴 마음이 있으면 빌려 타라는 것 일게다.
자전거라면 모르겠지만 오토바이는 빌리려니 좀 게름칙하다. 외국인은 국제면허증이건, 자기나라 면허증이건 상관없이 탈 수 있다지만 이번 여행에선 두 가지 다 가져오지 않았으니, 괜한 객기를 부려 오토바이를 빌릴 생각을 접는다.
이곳엔 아침에 집 밖으로(정확히 말하자면 길 가에) 나와있는 사람들이 많다. 왠지 이곳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전부 집 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 집 안을 들여다보면 여자건 어린애건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거의 밖에서 서서, 혹은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거나, 담배를 피거나 얘기를 나눈다.
카트만두에서도 비슷했다. 숱한 실업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침 8시쯤부터 10시까지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와 어디론가 이동한다. 그중 70-80% 가량의 사람들이 걷고 있는데, 하릴없이 걷는 걸음걸이가 아니다. 바삐 움직인다. 마치 '나는 실업자가 아냐, 엄연한 직업이 있는 몸이라구!' 라는 것 같다.
그래서 카트만두는 얼핏 보기에 몹시 활기있는 도시처럼 보여 이 나라가 실업율이 무지하게 높고, 빈곤의 나라라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어쨋든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할 일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거리로 나서는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카트만두 인구 전체가 150만 정도라는데 얼핏 보기엔 서울의 인구를 능가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것 참...... 묘한 나라다.
아침에 호텔을 빠져나와 레이크 사이드에서 조금 떨어진, 과거 티베트와의 교역으로 번성했던 시장이라는 올드 바자르(Purano Bazar)로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시가지를 이리저리 돌아 올드 바자르에 도달했는데, 하필 버스 안에는 야간 근무 후 퇴근하던 호텔직원(우리가 묵는)이 우리가 하차할 지점을 가르쳐 준다. 그는, 좀처럼 외국인이 버스를 타지 않는 이곳에서 우리를 보고는 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름인 푸라노 바자르를 외국인들은 올드 바자르 라고 하는데 그것은 옛 시장이 있었다는 얘기다. 옛 시장으로서의 면모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상권이 다 소멸되었다. 구멍가게 몇 개뿐, 뉴 바자르 쪽으로 다 몰려가 버렸다. 여기서도 '올드'는 '뉴'에 먹혀 버리고 없다.
가까운 프리티비 나라연 캠퍼스(Prithvi Narayan Campus)를 찾았다. 대학교인데, 그 교내에 '안나 푸르나 자연사 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이 있다는 가이드북의 안내에 따라 들어가 보았다. 이 박물관은 우리를 한참 미소 짓게 했는데, 박물관의 전시물 전시방법이 독특해서였다.
꽤 큰 개인주택 만한 건물인데, 입구에 들어서면 직원이 국적과 이름을 적도록 했고 입장료는 없다. 우선 들어서면 네팔의 동물들(주로 치트완 국립공원이겠지)이 방의 벽을 따라 시멘트로 부조처럼 양각되어 있고, 그 부조에는 꽤 정교하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서 코끼리, 코뿔소, 레드 판다, 킹 코브라, 원숭이 등이 벽을 따라 이동하듯이 그려져 있다.
요컨대, 덩치 큰 실물 박제품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별도의 방에 진열된 네팔의 새들이다. 박제가 된 것 같기는 한데 모두 발랑 엎어져 놓여있다. 말하자면, 우리네 처럼 내장을 모두 끄집어내고 눈에는 눈알의 모조품을 끼워 넣어 나뭇가지위에 살아 있는 것처럼 날개를 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은 새를 가져다가 방부처리만 해서는 거꾸로 눕혀 놓은 것이다. 이 새들의 진열모습을 보고 우리는 많이 웃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박물관이 그저 박물관이겠는가. 또 다른 방에는 나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우리네가 흔히 보아 왔듯이 큰 상자에 나비를 핀으로 고정 시킨 것에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서 벽에 부착해 놓은 것이 아니고, 10개 정도의 박스에 서랍이 200개 정도 있는데, 이 서랍을 당겨 열면 유리가 덮인 상자에 핀에 꽂혀 잘 정돈된 나비가 짠! 하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비나 나방, 곤충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서랍을 전부 당겨내어 전시물을 관람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200여개의 빡빡해서 열기 힘든 서랍을 전부 당겨내어 나비를 수없이 봤는데 나중엔 손가락이 얼얼할 지경이다.
아무튼 지극히 네팔리 다운 전시방식이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한다. 이 나비들의 박스는 힘 조절이 안 되어 앞으로 많이 빼낼 때는 서랍이 빠져 버려서 유리덮개는 물론 전시품이 망가져 큰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서랍의 빼기, 넣기를 반복했겠지만 다행히 나비를 채집하는 근심스런 손짓처럼, 부주의하진 않아서 깨뜨린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서 없는 듯 하다. 왜냐하면 진열대 위에 '서랍을 뺄 때 조심하시오!' 라는 문구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서랍 빼기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 아무도 관람을 하지 않았던지......
우리는 다시 뉴 바자르의 머헨드러 풀(Mahendra Pul) 이라는 곳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곳은 시장이었는데 상당히 번창한 곳이다. 하긴 '올드'를 집어 삼킨 곳이니 말이다.
이곳은 '세티 건더키'강의 기이한 물 흐름을 볼 수 있는 작은 다리가 있다 해서 들렀는데, 과연 다리 아래는 세상에!...... 이런 강물의 흐름은 정말 보기 힘든 광경이다. 다리 아래는 좁고 깊숙한 골짜기만 있어, 우리는 처음에 '이게 무슨 강물이야?' 했는데 아주 주의 깊게 들여다보니 그 깊숙한 곳의 바닥, 또 그 아래 깊숙한 곳에서 우윳빛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치 지하세계의 개울을 보는 듯 하다. 희한한 광경이다.
다리 주위와 아래에는 주변의 시장과 가정에서 던져놓은 쓰레기가 낭자하게 흩어져 있고 양쪽 상점에서 흘러내리는 하수가 아무런 여과 없이 흘러들고 있다. 극단의 풍치와 극단의 몰염치가 어우러진 광경이다. 우리는 시장에서 사과와 바나나를 사고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인근에는 한국식당 '뚝배기'가 있다. 주인장은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사람 좋아 보이는 양반이었는데 식당 부지가 상당히 크고, 연신 여기저기 손보고, 수리하고 확장하는 중이다. 여행사를 겸하고 있었고, 음식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
쇠고기 볶음 정식과 제육볶음 정식 등 2인분을 먹고, 밥을 한공기 더 추가 했는데 440루삐(6,600원 정도)이니 우리네 기준으로 하면 상당히 싸고, 이쪽 기준으로 하면 꽤 고급요리 가격이다. 육식을 별로 즐기지 않는 우리지만 트래킹을 끝내고 나니 이상하게도 육식을 자꾸 찾고 있다.
주인장의 말로는 자그마하게 운영하던 가게를 이번에 확장해 개업하게 됐다고 한다. 여기서 좀 더 머무르면 꽤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