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3월 5일 (고사인 쿤다)
새벽에 일어나 어제의 거네스 봉을 보니 깨끗이 구름이 걷히고 거의 나체를 드러내며 아침 햇살을 듬뿍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우리는 아침 8시 50분 라우레비나를 출발했다. 쪼르텐이 있는 언덕에서 쉬다가 곧바로 올랐는데 엄청난 깊이의 골짜기를 곁으로 하고 계속 나아갔다.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골짜기였는데, 그 깊이를 무어라 하기엔 나의 표현력으로는 애초에 무리다.
처음으로 작은 산정호수가 나타났는데 서러숴티 쿤다(Saraswati Kund)라고 했다. 아스라한 절벽을 발밑으로 하고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누르며 걸으니, 두 번째 버이러브 쿤다(Bhairab Kund)가 마치 물고기 비늘이 일제히 반짝이듯 빛나며 나타났다. 이런 4,000미터가 넘는 산정에...... 세 번째 나타난 것이 고사인 쿤다(Gosain Kund, 4,380m). 예상했던 것처럼 엄청 큰 호수다.
잔설로 뒤덮인 거대한 산자락이 호수의 표면에 드리워져 있고, 물빛은 푸르다 못해 섬뜩할 지경이다. 거울 같은 호수의 표면은 바람 한 점 없는 탓인지 생채기 하나 없는 거울 표면 같다. 깨끗이 가공된 다이아몬드 같은 수면은 이 세상의 물 같지 않게 전체가 커다란 고체 같이 굳어 있는 듯 하다.
기이할 정도로 맑은 수면은 감히 돌맹이 하나 던져 넣기 두렵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혼이 빠져나가 수면 속으로 잠수될 듯 싶다. 이 묘한 미궁의 호수를 넋을 잃고 오래 쳐다보면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릴듯하여 우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호수 주변을 한번 걸을라치면 족히 한시간은 걸릴 것 같다.
당초에 우리는 고사인 쿤다의 롯지에서 숙박하려 했으나 페디(Phedi, 3,630m)까지 곧장 넘어 가기로 했다. 페디로 넘어 가려면 라우레비나약 패스(Laurebinayak Pass, 4,610m)라는, 이번 여정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통과해야 한다. 라우레비나약 패스는 칼날 같은 눈밭이었는데 아이젠 없이도 걷기에 큰 위험은 없었으나, 칼날 같은 모양새 그대로 딱딱하게 굳은 눈 때문에 등산화가 걸려 걷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우리는 심한 고소증세를 느끼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이다. 고사인 쿤다에 잠들어 있다는 비스누 신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걸까?
고사인 쿤다를 뒤로 하고 라우레비나약 패스를 넘으니 구름이 몰려온다. 헬럼부쪽 루트로 들어 선 것이다. 아이구, 헬럼부의 산들을 보긴 힘들겠군. 어라? 눈이 오기 시작한다. 싸라기 눈이다. 우리는 마음이 다급해진다. 여긴 4천미터가 넘는 고지대인 것이다. 거대한 산자락을 훑고 내려온 엄청난 돌밭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갑자기 우리는 어느 혹성에 불시착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운무(雲霧) 때문에 가시거리가 얼마되지 않는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찻집 '야이탄'은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은 없다.
다시 가파른 바위와 자갈길을 조금씩 미끄러지며 내려오니 페디였다. 라우레비나에서 고사인 쿤다를 거쳐 여기까지 점심식사 시간을 포함, 7시간 20분이 걸렸다.
페디에는 절벽에 걸려있는 롯지 하나, 그 절벽 아래 있는 것 하나, 이렇게 둘이다. 묘한 지형의 묘한 롯지들이다.
우리는 절벽에 걸려있는 롯지에서 묵기로 했다. 롯지 옆으로는 족히 700m는 됨직한 절벽을 타고 폭포가 쏟아지고 있다. 우리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감싸는 것도 잊고 이 거대한 폭포를 마주 하고서, 거인국에 들어선 소인국의 난쟁이들처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싸라기 눈은 계속 내린다. 이런 식으로 눈이 계속 내린다면 산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불안이 엄습한다.
롯지의 시설은 여태껏 숙소 중 최악이다. 손님용 숙소는 바깥에서 보기에도 판자가 숭숭 비어있는 곳이 많아서 웬만한 침낭으로는 추위를 견디기 힘들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도 식당의 난로에서는 대단한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롯지의 투숙객은 우리와 독일인 커플 뿐이다. 그들은 식당의 구석진 곳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한 쌍의 오소리처럼 우리를 관찰하고 있다가 노트에 글을 쓰는 나를 보더니 중국인이냐고 묻는다. 열흘넘게 수염을 깍지 않아 덥수룩한 내 몰골은 오히려 티베탄 같을텐데...... 남쪽 한국인이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이 루트에서 아직 단 한 명의 중국인을 본 적도 없는데...... 누런 얼굴이면 전부 중국인으로 보이는 게야?
밤 8시, 산속에서의 취침시간이다. 독일인 커플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식당의 따뜻한 곳을 우리에게 양보하고, 용감하게도(!) 구멍투성이 게스트 룸에 들어가서 자겠다며 우리더러 자기네들이 웅크렸던 자리를 가리킨다. 우리 역시 형편없는 게스트 룸에 질려서 식당에서 자려고 이부자리 준비를 하던 중이었는데, 젊은이들로서는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기가 불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뭐 우리도 젊었을 땐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을, 우리만 있을 수 있는 네모진 공간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그렇지만 '제 8요일'의 '아그네시카'와 '피에트레크'도 아니고 이 추위에 이런 용감무쌍한 도전을 하다니 조금은 황당하다.
많은 트래커들이 추운 계절엔 유일하게 난로가 있는 식당에서 모여 자기도 하지만, 마치 우리가 그들을 내쫒은 것 같아 좀 뭣 했지만 덕분에 우리는 난로의 온기가 남아있는 식당에서 따뜻하게 잘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두 명 만의 공간' 보다 '두 명을 위한 열기'가 더 필요한 나이인 것이다.
흠! 그렇지만 별로 서운하진 않다. 우리도 그런 시기를 보냈으니......
《쪼르텐 Chodrten》 진언(眞言)을 새긴 마니석이 봉납된 티베트 불교의 불탑. 쪼르텐을 지날 때는 시계방향으로 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