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2)중늙은이의 히말라야 일기

운농 박중기 2013. 7. 29. 13:56

 

2월 27일  (행복의 질(質))

 

 7시에 일어났는데, 고산병 증세로 어제부터 관자놀이를 펄떡이게 하던 기분 나쁜 통증은 많이 사라졌다. 인간이란 이런 고도에도 적응하게 되어 있나 보다.

 9시 20분쯤 마을을 출발, 오늘은 마을 뒤편에 있는 킴슝 빙하를 마주볼 수 있는 야크 커르커(야크 방목 오두막)에 다녀오기로 했다. 가이드북에는 왕복 4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여기가 3,730m, 킴슝 빙하 아래 야크 커르커 까지 가면 그곳은 4,200m, 짧은 시간 안에 고도를 500m 가까이 급격히 올리는 코스니 서두르지 말고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랑탕리룽의 웅장한 산세가 눈 앞 가득 위용을 뽐내고 흰머리 독수리 같은 봉우리는 더욱 오만하게 다가온다. 오른쪽에는 컁진리의 꼭대기에 룽다와 타루초가 펄럭이고 있고, 산사태가 난 경사면은 엄청난 위압감을 준다.

 우리는 파커를 배낭에 넣고 갔지만 꺼내 입을 정도의 온도는 아니다. 마침내 커르커에 다다르자 랑탕리룽은 흰 봉우리 위에 구름을 흩날리고 있고, 빙하는 계곡 아래로 쏟아져 내려오다 갑자기 멈춰버린 형상이다. 거대한 산자락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다. 1시간 30분 만에 커르커에 도달한 것으로 보아 가이드북과는 달리 커르커에서 사진 찍고 비스킷 한 봉지 먹고, 빙하 흐르는 뿌연 물에 손 담그고 쉬어 가도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커르커가 있는 곳은 넓은 평지로 철쭉 같은 관목들이 온통 뒤덮고 있다. 마냥 두 팔을 크게 벌려 있고 싶은 장엄한 광경이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면서 숨이 차서 뒤돌아보지 않았던 나얀 칸(Naya Kang, 5,844m)이 하늘의 절반을 메우고 섰다.

 적설(積雪)이 일정치 않아 흑백의 얼룩이 뚜렷한 눈 덮인 나얀 칸은, 등지고 있는 더없이 파란 하늘과 어울려 잘 찍은 컬러사진 같이 생생하다. 거대한 산자락의 그림자가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드리워져 있고, 하늘엔 구름 한점 없다. 공기는 신선하고 더할 나위 없이 향기롭다. 왼쪽 컁진리 봉우리 끝에 룽다와 타루초와 함께 펄럭이고 있다. 모든 게 또렷하고 아름답다. 우리는 내려오다 한참을 멍하니 거대한 풍경 속에 압도되어 한숨만 쉬고 있었다.

 '아! 우리가 다시 이곳에 와서 이 광경을 볼 수 있을까!'

 

 내려오는 길은 작은 돌들이 깔린 길이라 미끄럽다. 머릿속의 작은 통증은 없어졌다. 우리는 다행히 고도에 잘 적응하고 있다.

 롯지에 내려오니 일본인 셋이 이웃 롯지의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우리를 보고 싱긋 웃는다.

 남자는 70가까이, 여자는 60이 넘은 나이 같다. 더구나 노인은 걸음걸이도 별로 경쾌하지 않아 의아해 했더니 치린이 헬리콥터로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오를 때 무슨 소리가 나긴 했었다. 또 한사람의 남자는 40대로 보여 치린에게 물었더니 카트만두에는 헬기를 이용해 관광을 주선하는 일본인 여행사가 있단다.

 '아하! 그래서 저 양반들이 여기에 있군.'

 11시간 가까이 비포장 길에 먼지 범벅의 시외버스를 거의 죽음을 무릅쓰고(!) 와서, 3일을 줄곧 걸어 당도한 이곳을 저들은 단번에 와서 있다니......

 은근히 '힘들여 오지 않는 자는 볼 자격도 없다'는 시샘이 뱃속에서 치민다. 그렇지만 '뭐 저들이 이곳에 오지 말라는 법도 없고, 걸어서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웬 심술이야.'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도대체 고소적응은 어떻게 된 거지?...... 어떤 비책을 썼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의 걸음걸이가 비틀대고 이상한 것으로 보아 두통으로 몹씨 힘들어 그러는 것일 수 도 있고, 서둘러 내려 가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저 일본인들 외에는 이 컁진곰파에 머물고 있는 트래커는 우리 밖에 없는 것 같다.

 

 점심을 먹고 잠시 쉬다가 이번에는 마을의 동쪽 캉첸포 쪽으로 가기로 했다. 랑탕 빙하와 랑시사 빙하가 마주치는 아래에 있는 랑시사 커르커(Langshisa Kharka, 4,160m) 쪽으로 가는 길인데 그곳까지는 왕복 8시간이나 소요되고 중간에 롯지나 찻집도 없어 텐트가 없이는 다녀오기 어려운 코스라 우리는 랑탕콜라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돌아오기로 했다.

 마을에서 벗어나자 곧장 깊이 꺼진, 엄청난 넓이의 분지가 쿵! 하고 펼쳐져 있는데 가히 장관이다. 여기에도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이 하나 들어서도 되겠다.

 30분쯤 걸었을 때 거대한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려 온 중간으로 빙하의 시내가 흐르고 있었고, 석회질이 섞인 듯 뿌연 시냇물은 무수한 돌과 모래지역 아래편의 랑탕콜라로 흘러들고 있었다.

 분지에 내려서니 동쪽으로는 캉첸포를 비롯한 나얀 칸의 풍만한 설산이, 북쪽으로는 랑탕리룽의 거대한 설산이, 서쪽으론 지나온 랑탕계곡과 쭈뼛쭈뼛한 거봉들이 솟아있다. 대단한 장관이다. 바닥에는 이름모를 작은 꽃이 수없이 피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 3,700m 가량의 높은 분지의 척박한 터전이 아직도 힘겨운지 잎도 없이 직경 3-4mm 가량의 꽃만이 우리의 투박한 등산화에 짓밟히고 있어 걸음걸이가 어쭙잖게 흔들린다.

 

 돌아오는 우리를 보고 롯지의 주인 양진은 우리를 반기며 빙그레 웃는다.

 "샤워 할 수 있어?" 하니 난처한 얼굴이다. 어제부터 샤워 실이 잠겨 있어 왜일까 했었는데 고장인 모양이다. 부엌의 양푼 한 그릇 더운 물로 찬물을 섞어서 머리 감고 세수하고, 발까지 씻는 경험은 군대생활 이후로 별로 기억에 없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건조하고 높은 고도 때문인지 이틀째 씻지 않아도 몸에서 냄새가 없는 게 신기하다.

 

 내일은 랑탕마을로 다시 하산하는 루트다.

 치린의 말로는 내일이 랑탕 마을 티베탄 부디스트들의 명절날 이란다. 때맞춰 온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명절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흠! 볼 만 하면 좋겠군.

 

 어제 저녁처럼 오늘도 식당 장작난로 곁에 앉았다.

 양진과 치린, 그리고 우리.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누다(워낙 심란한 수준의 콩글리쉬라 심도있는 얘기는 엄두도 못 내지만) 양진이 '창'을 내 왔다. 창은 쌀과 보리 등 여러 곡물로 만든 우리네 탁주와 같은 술인데 곡물을 볶아서 누룩을 섞어 며칠동안 숙성시켜 물을 넣고 걸러내어 마시는 것으로 '창'은 티베트어, 네팔어로는 '자드'라고 한다. 우리네 동동주 하고도 비슷한데 우리 것 보다 훨씬 순하고 부푼 밥알이 잔 위에 떠다니는 것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술의 질로 보면 우리네 것 보다는 훨씬 못 미친다.

 그들의 매력 있는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내일이 명절이라 양진의 화덕에는 밀가루 반죽튀김(밀가루에 설탕과 야크 버터를 가미해 기름에 튀긴 것)을 만드는데 양진과 치린은 반죽으로 여러가지 모양을 만들고, 양진의 사촌은 그것을 기름에 튀겨낸다.

 대체로 네팔의 남자들은 부엌을 여인들의 전용공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고,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나 조리 하는 것에 별로 스스럼이 없는 것 같다.

 치린은 남의 부엌에 척 하니 앉아 밀가루 반죽을 펴고는, 갖가지 모양을 만드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스무 살 중반의 총각이 익숙한 솜씨로 음식을 만드는 품새는 우리네 그 또래와 너무 다르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대체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한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선 이들의 방식이 행복의 질을 논할 땐 훨씬 우월할 것 같은 느낌이 가끔 드는 게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네 삶의 방식은 화려하고 복잡한 문양의 큰 중국 화병 같다면, 이들의 삶의 방식은 작지만 매끈한, 문양 없는 백자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밖을 나오니 하늘엔 수많은 별이 작은 전구들을 켜 놓은 듯 하다. 맑다 못해 처연하게까지 느껴지는 반짝임이 일순 가슴속에 싸아 하게 내려앉는다. 왜 이곳에서 별빛을 보면 눈물이 나오려고 할까? 마치 차가운 심해수(深海水)에 영혼을 담갔다가 건져낸 느낌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