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두번째 이탈리아, 그리고 부다페스트(15)

운농 박중기 2018. 6. 7. 22:13

4월 19일 (목) 베로나


베로나는 시에나, 오르비에토 처럼 전 시가지가 고색창연한 중세시대 건물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구시가지라 하더라도 새로운 건물과 구조물들이 약간씩 혼재되어 있어서 약간

피렌체와 비슷한 분위기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베로나는 유명 건물 등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에는 작은 팻말을 세워 두었다.

버스의 정류장 표시 전광판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정류장의 시간표도 대체로 정확했다.

또한 광장에도 작은 이정표를 세워 놓아 일일이 시만들에게 묻지 않아도 됐다.

뭐랄까, 시청의 행정력이 미치고 있는것 같은 도시다.

이런 도시는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이다.


'성당의 도시'라는 얘기가 있어 둘러 본 산 체노 마조레 성당(Basilica San Zeno Maggiore)

과 산타나스타시아(Chiesa di Sant'Anastasia), 두오모(Duomo) 등 아주 특이한 성당들은

유럽의 숱한 성당에 질린 사람들도 베로나의 성당들은 반드시 둘러 봐야 할 것 같다.

특히 산 페르모 성당(San Fermo)은 가이드 북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천년은 넘은 오랜

성당인데 천정의 목구조(木構造) 형태가 아주 특이해서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감상했다.

그 오랜 세월을 버텨 온 목재라는데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특이한 구조가 아름답다.

서까래와 아치형 천정틀이 이어지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구조라 한참을 유심히 보았는데, 

이 특이한 구조에 관심들이 많았는지 복도에 그 천정 구조물의 작은 모혈틀이 전시되어

있어서 관람자의 이해를 도왔다.

천년도 훻씬 넘은것 같은 시대에 저런 설계를 하고 그 엄청난 목재를 들어 올려 이 세기까지 

지탱하도록 한 장인들에게 존경심을!

이 시대에도 저런 구조물을 만들수 있을진 몰라도 실효성과 경제성을 앞세운다면 현대의

정서로는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그것을 실감하는 곳은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과 줄리엣의 무덤(Tomba di Giulietta) 정도인데, 줄리엣의 집은 수많은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줄리엣이 로미오를 기다렸다는 발코니를 보다가 괜히

멋적어져 서둘러 인파를 헤치고 나와 버렸다.


베로나 한켠의 골목에 있는 리스토란테에서 식사를 하면서 보니 젊은 종업원들이 손님들과

유쾌하게 어울리면서 즐겁게 일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선 보기드문 광경인데 역시 베로나는 로마와는 달리 여유가 있고 살벌하지 않다.

하긴 뾰로퉁하고 무뚝뚝한 로마 녀석들만 봐서 이탈리아인 전체가 그렇거니 하는 건 물론

잘못 된 생각일것이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에서 여행의 절반을 넘기면서 별로 달갑지 않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접해서

이런 유쾌한 젊은이들을 보는것이 신기한 것이다.

하긴, 우리네도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에서도 사람들은 굳어 있고 긴장된 표정이지 않은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사람들 표정이 같을순 없겠지.


모자란 식품을 사려고 숙소 근처 대형 마트로 갔다.

이 대형 마트는 정말 엄청나게 넓다. 구매자는 그리 많지 않고, 오히려 어이없게 적어서 매장 

진열대가 1번에서 20번이 넘는데 한 진열대 골목에 한 두사람만 있는 정도이다.

왜 이렇게 구매자도 적은 지역에 이런 엄청나게 큰 매장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주차장을 포함해 전체 규모가 거의 축구장 반 크기만 하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매장에 딱 한군데의 출입구만 있어서 반대쪽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그 넓은 건물을 빙 돌아 들어와야 해서 '참 이 친구들 이상한 녀석들일세!' 했는데

일단 건물을 들어와서 진열대 쪽으로 가려면 그 반대쪽에 작은 입구 하나만 개방해 두어

또 한참을 걸어서 가야한다. 도무지 구매자들을 위한 배치는 아니다.

계산원은 계산중인 손님 뒤에 대기자가 한사람 있는데도 계산중인 것만 마치고 뒷사람에겐

자기는 닫았다며 손사래를 치며 가 버린다.

가만히 보면 이 나라에 와서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있다.

모든것이 무언가를 사용하는 자, 또 무언가를 사는 구매자, 무언가를 이용해야 하는 이용자,

말하자면 일반 서민들, 보통 사람들, 여행자들을 위한게 아니고, 그것에 투자한 자본가, 가게

주인, 식당 주인, 또 그런 자본가나 주인에게 고용된 사람 위주로 되어 있다.

어찌보면 마트 계산 노동자의 경우는 자신의 노동시간을 칼 같이 지켜 자신의 권리를 조금

이라도 침해 당하지 않는 좋은 사회로 볼 수도 있다. 또 우리네 갑질 아저씨, 아줌마는 얼씬도

못할 좋은 사회일 수도 있다.

또, 자본가는 자신의 투자처에서 고객이 진상 부리지 않고 괜스런 민원제기로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자본가 태평시대를 만끽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네 사회의 어중간한 정서(갑질, 온정주의, 고객 제일주의, 고객은 왕이다! 등)에

찌들어 살아온 나로서는 이 치들의 인정머리 없고 자기본위의 행태들이 정나미 떨어진다.

이 나라는 내가 다녀 본 나라중에서 가장 '자기 본위'의 나라다.

나 역시 한국사회의 한줄기를 거쳐 온 별수없는 늙은이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