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운농의 뉴질랜드 자동차 여행
2011년 3월 15일 (크라이스트 처치 4일째)
지진의 땅을 딛고 나흘째 크라이스트 처치에 있다. 인간은 역시 적응에 뛰어난 동물이라 잘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므로 우리 역시도 예외가 아닌지라 잘 견디고(실은 딱히 견딘다고 할 만한 것은 없지만!) 있다.
내일은 여기서 1시간 30분 거리인 함머 스프링(Hanmer Spring)에 가기로 했다. 이제 슬슬 북진해야 할 날짜도 다가왔지만
19일에는 픽턴에서 웰링턴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하므로 그 시간에 맞추기도 해야 했다.
TV에는 일본의 대지진에 대한 보도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하긴, 내 생전 처음 보는 큰 재난이기도 하다. 그것도 몇일 있으면 그곳을 경유하여 귀국해야 하는지라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TV에 쏠렸다.
오늘 보도에는 바람의 방향이 동경쪽으로 불어, 누출된 방사능이 10시간이면 동경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니 일본 전역이 거의
공황상태가 아닐까 싶다.
TV속의 센다이 시내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경우 TV속의 일본은 우리네와 좀 다른 부분이 있다. 우리네 같으면 울부짖는
장면들이 속출할텐데 어찌된 셈인지 그들은 순한 양처럼 조용하다. TV 인터뷰에도 우는 사람은 찿아볼 수 없고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다. 왜 우리와 다를까? 우리네는 그들보다 격정이 많아서? 아니면 원래 한이 많은 민족이라 그런 불행의 외향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들은 지진지대라는 특수한 지형에 오랫동안 산 덕에 이골이 나서?
아니면 우리네 TV는 재난의 장면에서 울부짖는 등 격정적 몸짓을 방영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큰 재난이 있을때 마다 우리네 TV에서 다투듯 보여주는 울부짖는 모습은 개인적 프라이버시 측면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 TV들은 그런 격정의 장면이 좋은 방송용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남의 근심과 슬픔을 너무 노골화하여 화면에 내보내는 것은 비탄에 빠진 개인에게 예의가 아닌 것이다.
지진으로 만신창이가 된 크라이스트 처치 중심부를 그 가장자리에서 살피며 묘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은 '종교의 실종'
이었다. 이 도시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분위기는 사실상 없었다.
이 사회의 지극히 단편적인 일면만을 목도하고 잠시 머물다 가는 객(客)이지만 그런 냄새는 예민하게 맡을 수 있는 법이다.
뉴질랜드의 산골이나 도시, 관광지, 그 어디에서도 종교의 냄새가 나는 곳은 없었다.
교회는 간혹 눈에 띄었으나 모두 침체되고 따분한 모습이었고, 그 어떤 활기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곳의 건물중에 지진으로 쓰러진, 그리고 다친 건물들이 교회가 많다는 사실이다. 리카튼 인근의 묘지를
끼고 있는 교회의 첨탑은 부러져 땅바닥에 일으켜 세워 놓았고, 묘지 인근에 부서진 조각들이 잔뜩 쌓여있고, 우리 숙소 앞의
'녹스'라는 교회는 아예 60% 정도가 무너져 내려 내부가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또 이름 모를 교회들이 무너져 내린것을 많이 봤는데, 중심부를 통제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도시의 상징이요 중심인
크라이스트 대성당이 무너져 내렸다고 하니 과연 교회들의 수난이다.
물론 교회외에도 무너진 건물들이 많지만 , 교회라고 생긴 건물은 거의 하나도 성한 곳이 없다는 얘기다.
자세히 살펴보니 교회 건물들이 하나같이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건물들이라 지진에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인인 것 같았다.
물론 최근에 지은듯한 붉은 벽돌 건물들은 멀쩡했고, 산뜻하게 보이는 최근 신축 건물들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
어쨋던 교회의 수난이 유난히 돋보였던 터라 지방의 소도시 교회들에서 느꼈던 그 침체되고 울적한(동유럽의 성당들에서
느꼈던 딱 그 분위기) 기운이 여기서도 그대로 재현되어 있고, 무너진 교회들에서 그 침체된 기운의 끝머리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종교의 침체라는 것이 이 시대의 무슨 유행 같은 것인지는 모르나(특히 기독교) 서구 사회에서 종교가 서서히, 아니 급격히
퇴화 되어 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기독교가 여전히 흥한 한국사회와, 힌두교가 아직도 강력한 인도나 네팔을 목도하긴 했지만
'종교' 또는 '신앙' 이라는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서서히 물러나 앉는것을 느끼고 있다. 특히 이 도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의 도시 답지 않게 침몰 되어가는 신앙의 퇴보가 안타까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도시에 경고성
징벌을 내린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도시는 하루 빨리 신앙심을 되찿아야 하는데 이미 그럴 것 같진 않다.
도시의 넘치는 환락과 수퍼마켓의 풍요를 보니 이미 그것은 물건너 간 것 같다.
종교, 특히 기독교의 경우 지나친 풍요는 필연적으로 신앙의 퇴보와 전횡을 가져 온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는 그 침몰의 원인 제공인 '지나친 풍요'를 끊임없이 갈구하지만 말이다.
제랄드 메사디에는 이런 얘길 했다.
"사상가, 철학자,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 이들은 자신들의 우위 선점 또는 범인(凡人)들의 위에 군림하기 위한 여러가지
사상, 이념, 철학, 교리 그 따위 것들을 생산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손에 노동의 자욱을 만들지 않고서도 항상 대중위에
군림하여 존경 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사회의 '문화'를 만들어 간다. 잘 먹고 잘 입으면서......"
지진으로 튀어오른 아스팔트를 피해가며 차를 끌고 리카튼 쪽의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맛이 기막히다는 피자를 맛보려고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입구에서 약간 차선을 잘못 밟자 마주 오던 키위 영감이 신경질적으로 빵빵거린다.
이곳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보면 더없이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남이 무언가를 물으면 열심히 설명하는 등(잘 알아듣지 못해
핵심사항만 얘기해 주면 훨씬 고마우련만!) 나무랄데가 없는데, 다만 공동이 지켜야 할 룰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좀 지나치다고
할 만큼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어떤 면에선 이들의 예의와 친절이 조금은 포장된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우리네의 경우 예의와 친절은 형편없지만 상대의 사소한 실수에 상당히 관용적인 면이 많은데 말이다.
우리네와 이들의 속성 중 어떤것이 사회적으로 이로울까를 따지만 당연히 이들의 방식이 맞는것 같긴하나 어쩐지 가끔은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다는 지극히 한국적(!)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어떤 숙소건 온수(溫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나와서 빨래하는데엔 더 없이 좋다.
하기야 불구덩이 위에 있는 나라니 오죽하랴.
우리는 빨래를 산뜻하게(!) 끝내고 이 지진의 도시를 떠날 준비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