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두번째 이탈리아, 그리고 부다페스트(13)

운농 박중기 2018. 6. 5. 12:33

4월 17일 (화) 시에나


몸은 조금 회복된듯 했지만 아직 병증의 기운이 6할 정도는 남아 있는 것 같다.

오전에는 누워서 잠을 자거나 쉬고 오후에 나서기로 했다.


외곽에 위치한 숙소로 인해 캄포광장 까지 가려면 매번 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숙소는 가격대비 나름 격조가 있고, 베란다가 넓어 바깥 풍경을 느긋하게 즐길수도 있고, 갖출것은

다 갖춘 내실있는 곳이다.

하긴 한 달간의 여행 기간인 만큼 좁다란 호텔방에서 비비적거려서야......

아침과 저녁식사를 직접 해서 먹어야 하고, 점심은 밖에서 해결해야 하는 패턴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런 패턴은 무엇을 먹을까, 어느 집이 입맛에 맞을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 입맞에 맞는 재료를

구입해서 먹는 즐거움이 있어 좋다. 무엇보다 엄청 비싼 이탈리아의 레스토랑이나 카페 음식을 게름칙한

기분으로 먹지 않아도 되고 식비를 많이 줄일수 있어서 좋다.

또, 2016년에 왔을때 레스토랑의 짠 음식에 진저리를 몇번 경험 했던 영향도 있었다.  

대형 수퍼마켓의 식재료 가격이 대체로 우리네 보다 싸서 평소에 잘 먹지 못하던 재료를 부담없이 구입

해서 먹는 재미도 있다.


캄포광장을 다시 찾아' Torre Mangia'라 이름 붙혀진 탑에 올랐다.

힘들게 오른 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캄포광장과 시가지, 그리고 멀리 토스카나의 구릉지대가 보이는

풍경은 압권이었다.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에나의 지붕들은 갈색과, 올리브 색이 섞인 묘한 색깔인데, 도시마다 조금씩

지붕의 색깔이 다른것은 특별한 색깔을 선호해서라기 보다는 그 지방의 흙의 색깔, 굽는 가마의 차이

등이 그렇게 결정되는것 같다.

시에나의 지붕 색깔은 참 독특해서 물감을 풀어 재현하기에 어려운 질감이다.

2016년의 이탈리아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왔을때 가장 많이 떠올랐던 것이 시에나의 지붕들

이었다.

보슬비가 내리는 시에나의 골목들을 이리저리 어슬렁 거리는 것은 참 멋진 유희다.

젖은 포도가 번들거리는 것도 좋고, 비를 맞아 짙어진 건물들의 벽면이 선명한 것도 좋다.

시에나는 골목길들을 걷는것 만으로도 흡족한 기분이 될 수 있다.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장중한 성당들, 경사진 길에 늘어선 주택들은 마치 멋진 그림속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가까이 있다면 일년에 한 달 쯤은 이곳의 거리에 묻혀 살고 싶다.

이곳에서 가장 어울리는 것은 보슬비 내리는 골목길을 우산을 쓰고 외투의 깃을 세우고 걷는 일이다.  

이탈리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 시에나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었다.  마치 그 골목길의 풍경

속에 녹아들것 처럼......


내일은 베로나(Verona) 행.

오후 시에나 기차역에서 베로나 행 완행열차를 타야 하는데 총 네개의 열차를 번갈아 타야 하므로 세번

환승해야 한다.

환승시간이 12분 또는 14분이므로 짐을 가지고 재빨리 내려서 다음 기차의 플랫폼을 확인하고 움직여

들어오는 기차를 재빨리 옮겨타야 하는 과정을 세번 반복해야 하니 긴장할 일이다.

기차가 연착이라도 하는 날엔......

더구나 이번 여정에서 가장 먼 구간이고, 베로나의 숙소는 이미 예약되고 요금까지 다 지불되어 있는

상태다.

만약 차질이 생기면 일정이 비틀리는데다 여러 곤란한 문제들이 생기게 된다.


짐을 싸서 여행을 다닌지 이제 18년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짐의 무게가 21킬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멍청한 짓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통 12 -13킬로를 넘지 않았는데

왜 이번 여행에는 아무 생각없이 꾸역꾸역 가방에 쑤셔 넣었는지 알 수가 없다.

공항의 수화물 무게 개량하는 밸트에 올리고서야 나의 미련을 깨달았지만 이미......

여태껏 읽지도 않은 책을 네권이나 넣고, 평소엔 넣지 않던 고추장이며 누룽지, 액체 카레까지 쑤셔

넣었으니, 이런 미련한......

그래서 짐을 평지에서 끌어도 무겁고, 계단이라도 나오면 죽을 맛이다. 왜 아무 생각없이 평소엔 하지

않던 짓을 했을까?

늙어가니 상황인식이 무뎌졌는지, 아니면 괜한 노욕이 생겨 이것 저것 가방에 쑤셔 넣는데 무감각 했는지,

새삼스레 참 어이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