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로마를 찾아서
3월 10일 (피렌체)
피렌체의 아침은 아직 춥다. 숙소에는 이른 새벽 난방이 꺼져 담요와 이불을 겹겹이 덮고 잤더니 잘땐
춥지 않더니 아침에 이불밖으로 나오기가 싫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라고 하지만 이 늦겨울에 꽃이 있기를 바랄순 없지만 우리네의 매화꽃 같은 붉고
작은 꽃이 나무에 매달린것을 간혹 볼 수는 있다. 야금 야금 봄이 오고 있긴 한 것이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고, 주인장의 말로는 몇일 동안 날씨가 대체로 맑을거라고 한다. 적어도 여기선
베네치아 처럼 하루종일 비를 맞고 다니지 않아도 될 듯하다.
두오모 성당을 거쳐 산 로렌조 성당을 지나 중앙시장 쪽으로 올라가니 가죽제품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
피렌체는 가죽제품이 특화되어 있다고 한다. 주로 가방과 지갑, 벨트, 점퍼 등이 주류인데 가죽냄새가
골목에 진동한다. 그 가게들 한가운데 있는 중앙시장은 아래층은 재래시장, 2층은 푸드코트다. 온갖 음식을
파는 가게가 즐비하지만 가격은 시장답지 않게 시내 레스토랑과 별 차이가 없다.
다시 강쪽으로 방향을 틀어 베키오 다리쪽으로 내려왔다.
베키오 다리는 온갖 매체에 많이 소개되어 있는 유명한 다리지만 다리 자체가 아주 아름답다고 할 순 없지만
피렌체 시내를 관통하는 아르노 강과 어울리면 아름답게 걸려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우피치 미술관에 입장했다.
비수기라 줄을 서지 않아도 됐지만 들어가서 한시간쯤 되니 실내는 관람객들로 제법 혼잡하다.
엘 그레코,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등의 그림이 생각보다 훨씬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림들을 손질해서 복원한 것인지, 아니면 옛 그대로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려한 색감과 생동감있는 화면은
방금 그려낸것 처럼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은 몇 점 없었고, 엘 그레코의 그림은 제법 있다.
역시 눈길을 끄는 그림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보티첼리의 이 그림은 내 기억으로는 중학생때쯤
미술책에서 접한 것 같은데, 이 관능적인 그림이 내가 처음 본 여성의 나체였던 것이다.
조개위에 나체로 선 이 그림은 한쪽 손으로 음부를 긴 금발로 가리고, 한쪽 손은 가슴을 가렸지만 매우 관능
적이다. 우리누스의 거세된 생식기가 바다에 떨어져 비너스가 탄생 했다는 신화를 그린 것이라는데, 남자의
생식기가 미의 상징인 여성을 탄생시켰다는 당시의 발상은 아무리 신화라해도 자극적이다.
이 그림은 상상했던것 보다 훨씬 컸다. 가로는 2미터쯤?, 세로는 1.5미터쯤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
보티첼리의 '봄(Spring/Primavera)' 역시 정교하고 화려하며 관능적이다.
미술관의 작품, 특히 80% 이상은 성서를 기반으로 그린 그림들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
되었음을 알리는 '수태고지'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함께 수백점은 될성 싶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화들은 전부터 회화집을 보면서 부터 느꼈던바지만 얼굴 표정들(성모와 성인,
천사 등)이 한결같이 무표정 내지 무심한 얼굴들이라는 점이다. 가끔 생동감 있는 얼굴 표정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90% 이상은 무표정, 무심함이다. 왜 그 당시 대가들이 얼굴에다 표정을 그려넣지 않았을까?
성모의 얼굴은 한결같이 굳어있고, 아무런 표정이 없다. 당시에는 그래야 한다고 여긴걸까?
또 한가지 기이하게 느껴졌던것은 어린아이(유아)들의 벌거벗은 몸(대부분 벌거벗은 몸을 그렸다)이 이상
하게도 신체비율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인의 몸은 비율에 맞게 그리면서 유아들의 몸은 허리가 이상하게 길다든지, 목과 얼굴의 밸런스가 전혀
맞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그 연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던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림들은 다섯시간 정도를 황홀하게 했다. 색채의 향연은 가슴속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우피치 미술관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오후 늦게 아르노 강을 건너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올라갔다.
작은 언덕위에 있었는데, 광장에서는 피렌체 시내가 모두 내려다 보인다. 피렌체 시내의 명소는 물론, 시
외곽까지 모두 연한 적갈색 지붕들이 옛 정취를 그대로 살리고 있고, 저녁 노을이 잔잔하게 퍼지고 있다.
광장 위쪽에 산 미니아토 성당은 묘지로 가득하지만 성당 앞 마당에서 보는 피렌체 시내는 미켈란젤로
광장에서의 전경보다 멋있다.
사실 유럽의 구 시가지들을 보면 공통적인것이 지붕의 색깔인데, 이 지붕 색깔의 통일이 시가지를 아름답게
하는 일등공신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지붕 색깔만 통일해도 이렇게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데......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내려와 스러지는 노을을 보며 찻집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몸을 녹였다.
속쓰림 때문에 좋아하는 커피를 기피해 왔지만, 노을에 물드는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 보니 그 갈색의
지붕들이 진한 커피향을 불러 마시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