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로마를 찾아서
3월 8일 (베네치아)
베네치아 3일째, 이곳을 어지간히 밟아본 것 같지만, 오늘은 섬의 남쪽 하부 쪽으로 들어가서 어카데미아
미술관을 보고, 섬의 거의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와서 아카데미아 다리까지 와서 산 마르코 광장까지
가는 루트로 정했다.
비는 여지없이 주룩 주룩...... 베네치아에서 하루도 맑은 날을 보지 못하고 돌아갈 것 같다. 습한 공기속에서
추위까지 있어 손이 시릴 정도다. 돌아 올때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 중국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한국식
짬뽕이 있다고 적혀 있길래 주문했더니 별 맛은 없고 된통 맵기만 해서 국물을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건더기만 건져 먹었다. '한국식' 이라면 매워야 되는 것으로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서비스료까지 해서 12.5유로, 우리 돈 17,000원, 우리의 짬뽕 거의 세그릇 값이다.
베네치아의 식당들은 거의 대부분 깔끔하며 분위기 있고 소위 럭셔리 하다. 최근에 들어 그런 경향이
더 강화되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외양만큼 음식맛은 대체로 별로다.
당연한 것이, 여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인데다 차츰 물이 들어차 지역민들이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품고 있고, 뜨내기 손님 일색인데다 모든 식재료를 외부에서 배로 실어나르고, 엄청난 땅값을 자랑하는
곳이니 비싼 음식일 수밖에......
차라리 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육지 베네치아의 지역민 식당에서 식사하는것이 비용면이나 맛에서 훨씬
나을거라는 생각이지만 점심 한끼 정도는 어쩔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육지쪽 베네치아의 레스토랑에서 먹은 치킨이 싸기도 하고 훨씬 맛있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의외로 작품수가 많았다. 소위 베네치아 화파의 태동에서 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작품들인데 흔히 보아 온 성화물(聖畵物)이다. 여태 보아 온 성화들과는 달리 색채가 좀 더 강렬하다.
그렇지만 아쉬운 것은 제법 들락거린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현대 작품들을 전혀 볼 수 없는게 아쉽다.
물론 현대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겠지만 성당, 미술관, 박물관 등 전부 성화물 일색이란 것이 조금은
지겹기까지 하다.
피렌체에 가면 현대 미술관을 찾아 보기로 하자.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의 보도는 물에 젖어 빛난다. 수백년 사람들의 발길에 스치운 돌들은 대리석 처럼
윤기있게 빛나고, 며칠째 계속된 비로 고색창연한 건물들은 축축히 젖어 색감이 진해져 운치를 더 한다.
꽃집의 백열등은 한낯인데도 밝게 빛나고 물기를 머금은 꽃들은 더욱 싱싱하다.
'밝은 천국의 통로' 같은 산 마르코 광장은 아쉽지만 비가 내리는 베네치아는 로맨틱 하다.
이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떠나 내일은 피렌체로 떠난다.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이탈리아에 들어온 후 늘상 유적에만 눈이 가 있어서 정작 이들이 사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다는게 아쉽다.
이제 피렌체로 가면 유적 보다도 도시의 분위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눈을 돌려야겠다.
무지하게 널린 유적들 속에서 정작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뒤로 밀려나 보이지도 않는 이탈리아에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
비오는 베네치아는 외로움을 준다. 이 며칠의 빗속에서 홀연히 혼자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화려하고 독특하며, 기상천외한 물의 도시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는건 참 아이러니 하기까지 한 일이다.
저녁 으스름이 내려앉아 하나 둘 상점의 불빛이 빛나 아카데미아 다리를 건널때에는 왠지 모를 나그네의
우수가 등 뒤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정호성의 시가 생각난다.
수선화에게 (정호성)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 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 가라
갈대 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정호성은 외로움의 정의를 아는 것 같다. 그는 수선화가 피어 나기 전 이 시기의 외로움을 안다.
혼자 여행할때 느끼는, 가끔 찾아오는 우수는 내 내부속에서 어지럽게 떠다니는 감정의 찌꺼기를 걸러
정화 시켜주는 역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우수가 어느땐 못 견디게 외로움에 떨게 하기도 한다.
또 그 외로움은 묘하게도 여행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주기도 한다. 그 '덥혀주는 역설적 역활'이
'홀로 여행'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니, 외로움은 싸늘한 서리가 되기도 하지만 따뜻한 훈풍이 되기도
하니, 이 상반의 우수 속 여정이 중독처럼 마음 한 구석에 각인될 수밖에......
그렇지만 오늘은 몹씨 외롭다.
습하고 추운 기운처럼 등으로 부터 들어 온 외로움이 가슴속에서 그 찬 기운을 퍼뜨리며 싸아하게
배회하고 있음을 느낀다.
베네치아를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