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2) 웃지않는 사람들, 러시아

운농 박중기 2015. 10. 1. 16:56

9월 11일. 금요일 (모스크바)

 

모스크바의 날씨는 여기 온 이후로 한번도 쾌청한 적이 없다.

뻬쩨르부르그의 맑은 날씨와는 많이 다르다. 수시로 가랑비가 내리다간 그치고 하늘은 잔뜩 어둡고 찌푸려

있다.

 

 출근시간의 지하철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다. 어두컴컴한 지하구내, 칙칙한 색상의 오래된 지하철, 어딜가나

희미한 황색 불빛이 켜져있는 지하도가 무거운 기분이 들게 한다.

모스크바의 지하철 역에 대한 가이드 북의 소개는, 역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어 지하철 역을 투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확실히 우리네 지하철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시간을 쪼개 투어를 할 만큼은 아니다.

공기도 별로 좋지 않은데다 시끄럽고, 인파에 밀리는 역내를 굳이 구경하고 싶진 않다.

천만이 넘는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가을날

숲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개미떼의 행진 같아 소우주(小宇宙) 속을 들여다 보는 듯하다.

 

 붉은 광장 앞에 다다르니 또 가방수색이다. 들어가는 모두의 가방속을 들여다 보고, 배낭속을 샅샅이 뒤져

보고는 들여 보낸다. 무슨 지킬것이 그리 많은지, 누군가 해코지 할 인간이 그렇게 많은건지......

모스크바에 온지 3일째, 배낭속을 벌써 열번은 까 뒤집어야 했다.

관람료를 내고 크렘린으로 들어서니 뭐 별거없다. 예의 큰 건물들과 성당, 그리고 커다란 대포와 깨어진 종.

그러다 어느 별관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 들어서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온갖 황금그릇, 장신구와 왕관, 무기, 옷, 마차(엄청 큰 마차가 실제로 열 다섯대쯤 있다) 등등 온갖 황금빛

보물(보물이라고 생각되는)들이 역시 엄청 큰 방안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데......세상에!......

어릴적 영화에서 본 해적의 보물창고가 딱 이러했다. 꽤 여러나라를 가 봤지만 이런 규모는 본 적이 없다.

여태껏 여러나라에서 본 보물들을 모두 합쳐도 여기 있는것의 1/3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모두 17 - 18세기 왕실이나 교회의 것으로 보이는데, 구 소련은 혁명후 이런것들을 어떤 기분으로 보관했을까?

이런것들을 사용한 권력자들이나 성직자 보다도 그것들을 만든 장인들을 한번 보고 싶다.

어떻게 하면 더 화려하고, 정교하고 사치스럽게 보일까 하며 서로 경쟁하듯 만든 그 장인들......

이것들은 한마디로 사치와 허영과 과시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탐욕과 권력욕으로 똘똘 뭉친 당시의 '힘 센 녀석'들, 권력자와 성직자 들이 결탁해서 힘없는 자들을 착취하고

수탈해 먹은 군상들의 잔칫상을 보는것 같아 그만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그곳을 나오며 하마트면 구역질을 할 뻔 했다.

왕정을 무너뜨린 자들이 저것들을 모조리 녹여 생활도구로 썼다면 더 좋았을터.

이 방 말고 또 다른 '다이아몬드 방'이라는 곳에는 이런 것은 상대가 안될만큼 더 진귀하고 값진 보물이 가득해

따로 입장료를 받고 관람한다고 하지만 전혀 볼 생각이 없다.

나 같은 인간에겐 저런 사치품들이 도무지 불편한 것이다.

 

 광장에는 중국인들이 엄청 많다.

어제와 같이 이 사람들은 정말 가관인데, 마구 소리를 질러대고, 그놈의 '셀프 카메라'인지 뭔지를 들고 다니며

자기 얼굴을 찍느라 설쳐대는 통에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왜 저렇게 자기 얼굴을 찍고 싶을까? 나로선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다. 남의 불편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것이 이들의 특별한 점인데, 그들이 마구

설쳐대는 근처에는 다른 사람은 마치 투명인간인듯 되어 버린다.

남을 밀치고 들어 오면서도 밀친 사람을 쳐다보는 법이 없고,식당에서는 마치 자신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듯 떠들어 댄다.

요즘엔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인 천지인데 앞으로도 이들의 막무가내 '아랑곳 하지 않음'은 계속 될 듯하다.

예전엔 한국인이 욕을 많이 들었다는데, 중국인들은 한 10년 지나면 나아질까? 지금으로 봐선 그럴것 같지 않아

보인다.

 

 볼쇼이 극장 맟은 편에 마르크스의 동상이 있다. 큰 돌을 깍아 만든 동상이다.

그 동상의 하단에는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라고 씌여있다.

지금 마르크스는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트베르스카야 거리를 걸어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나는 이 러시아에 무엇을 기대하고 왔을까?  하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저 보물들을, 붉은 광장을 점령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물결을 보고 싶었을까?

마르크스가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라고 한 말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져 카페에 들어가 맥주 한잔을

들이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