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1) 웃지않는 사람들, 러시아

운농 박중기 2015. 9. 30. 13:14

9월 10일. 목요일 (모스크바)

 

 모스크바에서의 첫번째 여정으로 잡은것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만나는 일이다.

러시아에 오기로 결심한 이유중 주요한 한가지다. 그의 집필실인 뻬르젤키노의 다차(오두막 별장)를 찾아

가는 여정을 생각하는것 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일찍 하고, 우선 2호선 '소콜'역에서 여섯 정거장째인 '찌아트르아르반야'역에서 

하차, 1호선으로 갈아타고 아홉번째 역인 '유고 짜빠드나야' 에서 내려 43번 버스를 타고 가는 루트를 잡았는데

막상 유고 역에 내리니 43번 버스는 없다.

물어 물어 746번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 종점에 다다렀더니 목적지가 아니었다.

'뻬르젤키노' 라는 지명앞에 다른 글자가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지명이 비슷한 동네로 온 것이다.

다시 젊은이에게 뻬르젤키노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를 들먹이며 물어보니 다행히 이 청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스마트 폰을 열더니 구글 맵으로 버스 번호와 정거장을 가르쳐 준다.

다행히 뻬르젤키노는 멀지 않아 20분쯤 달려 종점에 내리니 뻬르젤키노 기차 역이다.

여기서 부터는 약 30분 정도 걸어서 가야 하는데, 시골길에다 숲 속이어서 물어 볼 만한 사람이 있을까가 걱정

이다. 한참을 헤매고, 거의 스무명 정도의 사람에게 물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다차 입구는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러시아어로 된 작은 팻말이 전부였고, 어느 곳에도 그의 흔적을

알 수 있는것은 없었다. 팻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갔지만 아무런 추가 표시는 없다.

숲속 녹색 울타리가 나타나 계속 나아갔더니 울타리와 같은 색의 작은 출입문이 나온다. 출입문에는 A4 용지

크기만 한 코팅된 종이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뮤지움' 이라고 씌여 있었다.

그의 다차를 찾은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에 대한 러시아의 대접은 너무 초라하다.

여기를 찾는 나 같은 사람이 별로 없는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싶다.

우리네 같으면 이런 대접일까? 

'태백산맥'의 조정래 작가의 문학관이 전라도에 엄청 큰 규모로 건립되어 있고, 관광명소화 되어 있는 것을 

얼마전에 본 나로서는 이런 러시아의 대접이(?)이 실망스럽기 까지 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 당시 구 소련의 방해로 직접 수상하지는 못했고, 한참 뒤 그의 아들이 대신 수상했다는 얘긴 

들은적이 있지만 그의 명성에 비해 너무 초라한 대접인 것 같아 괜히 억울한 기분이다.

하지만 한국적인 문화 홍보와 러시아적인 것은 다를 수 있겠지 ......

아니면, 러시아에서 대접하는 파스테르나크의 위상이 내가 가지는 것하곤 다를 수도 있을테고. 

 

 울타리에 붙은 문이 닫혀 있는듯 하여 일순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밀었더니 열린다.

문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니 왼쪽으로는 작은 텃밭이 있고, 사진에서 본 그의 오두막 다차가 보인다.

마침내 그가 마지막 20년을 보냈으며, '닥터 지바고'를 집필했고,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으며, 생을 마친

오두막 다차를 찾은 것이다.

다차는 몹씨 낡았으나 내부는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노년의 할머니 한 분과 중년 여성, 이렇게 둘이 관리인으로 있다.

그들은 반가운 듯 반색을 했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드문 것 같다. 

서툰 영어를 하는 중년 여성의 안내로 방을 둘러 보았다.

1층에는 파스테르나크의 침실이자, 그가 사망한 1인용 침대가 3평 정도의 작은 방에 있었는데, 침대에 깔린

담요위에 오래되어 탈색된 꽃다발이 놓여 있다. 유달리 많은 러시아의 쯔베뜨이(꽃집)에서 꽃다발을 하나

만들어 올걸 하고 아쉬워 했다. 

이 작은 방에는 그가 숨을 거둔 모습을 뎃상으로 그린 그림이 액자에 있었고, 그의 장례식을 찍은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2층으로 올라서니 그의 집필실이다.

집필실도 4평 정도의 작은 방이었는데, 방안에는 책상과 의자, 책상위에 놓인 등잔, 작은 책장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양쪽으로 난 창문으로는 숲의 푸르름이 가득 담겨있어 집필실과 너무도 어울리는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작나무 몇그루가 그 숲의 품격을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

집필실 옆의 장의자가 놓인 작은 방에는 그의 신발과 외투, 목도리, 모자가 걸려있다.

'닥터 지바고'를 집필한 책상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갑자기 울컥하고 말았다. 안내하던 여성은 잠시 멈췄고, 나는 잠시 동안 감정을 추스려야 했다.

모스크바에 와서 이 도시의 외곽 시골의 숲속에 자리한 그의 집필실을 정말 어렵게 찾아와 그의 책상을

쓸어 보다니......

 

 그는 도스또옙스키와 더불어 내 인생 전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다.

이제 러시아에 온 두가지 목적을 다 이룬 것이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그의 부인과 아들이 연주했다는 피아노와, 그가 드로잉했다는 데상을 감상했는데 그의

데상 솜씨는 아마츄어의 것이 아니었다. 꽤 많은 데상들이 있었는데 주로 그의 자화상과 가족의 초상화, 

그리고 여인의 누드 크로키도 있다.

중년의 안내인이 내게 물었다.

'보리스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나는 대답했다.

'그는 나의 사랑입니다'

방명록에 적기를 권해 몇자 적었다.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 소박한 다차를 나와 올때와 역순으로 모스크바 중심부로 돌아왔다.

'붉은 광장'이 있는 '아호뜨늬낫드'역에서 내려 광장을 향해 걸었다. 입구에 있는 '마네쥐'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특히 중국인들이 많았는데, 내 곁의 한 중국인은 그들의 사진촬영에 내가 방해가 되었던지 내 등을 밀어

버리고는 사진촬영에 열중한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 사람들은 황당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특유의 큰

소리를 내가며 우루루 몰려 다닌다. 이 사람들의 무례와 무질서는 이 나라에서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고

큰 문제로 대두된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검색대를 통과해 광장의 초입에 들어서니 이게 왠일? 광장은 행사용 천막과 임시 좌석들, 임시 구조물 들로

가득하다. 광장은 보이지도 않고 바실리 성당의 지붕만 보일 뿐이다. 이게 뭐야?

임시 가설물들은 한군데에만 있는게 아니라 광장 전체에 걸쳐 여러개가 연이어 설치되어 있어 광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슨 페스티벌을 한다고 하는데 9월 13일까지 이런 행사를 한다니 모스크바를 떠날때까지 온전한 광장을 보긴

글렀다. 구 소련이 사그라지고 자본주의가 밀물처럼 몰려오면서 광장의 혁명의 열기는 광장 한 켠의 레닌 묘

에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광장 왼쪽에는 거대하게 자리한 굼(Gum) 백화점이 있다. 이 백화점의 규모는 내가 여태껏 보아 온 세계 어느나라 

백화점이 꿈도 꾸지 못할 규모였고, 그 화려함은 지금의 러시아가 지향하는 바를 너무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왠지 모를 거부감에 얼른 백화점을 나와 바실리 성당으로 향하려 했더니 갑자기 광장의 출입을 모조리 막아

버리는 것이다. 좀 황당하다. 아마 행사를 위한 조치인것 같은데 참 어이없는 일이다. 세계 각처의 여행객이

밀려와 있는데 자기네 행사를 치른다고 그 넓디넓은 광장을 차단해 버리다니...... 어이없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향유하면서도, 행정적인 자기 편의주의는 옛 소련 방식으로 단숨에

단행해 버리는 과감함을 꺼리낌 없이 드러내는것 같아 몹씨 불쾌하다.

 

 붉은 광장을 본의 아니게 쫒겨나와 구(舊) 아르바트 거리로 향했다.

아르바트 거리는 이스탄불의 이스틱날 거리처럼 차 없는 넓은 도로로 젊은이들의 거리였다.

이스틱날 거리 처럼 활기차지도 않고 역동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런대로 젊은 기운이 도는 거리였다.

아르바트 거리를 헤매다 늦게야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아침부터 밤 아홉시가 넘도록 걸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파스테르나크의 숲속 다차를 생각하니 오늘 하루가 너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