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웃지않는 사람들, 러시아
9월 8일. 화요일 (뻬쩨르부르그)
숙소 '해피 푸쉬킨 호텔'은 아침식사가 상당히 좋다. 연미복을 입고 턱수염을 꼬아 앙증맞게 작은 리본
으로 묶은 영감님이 음식의 세팅에서 부터 궂은 일을 마다 않고 하는데(여종업원이 있는데도) 그는 이 일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듯 하다. 이 중급 호텔에서 연미복을 꼭 입고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얼핏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의 관리시절을 연상 시킨다.
(마르멜라도프는 선술집에서 처음 보는 라스꼴리니코프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과 집안 얘기를 가감없이
얘기한다)
근사하게 빗어 넘긴 머리, 흰 브라우스에 검은 연미복, 재빠르고 정확한 몸놀림이 서양 영화의 충직한
집사를 연상케 한다. 종업원들에게 대하는 태도나 이것 저것을 챙기는 품으로 봐선 아마 이 호텔의 주인이
아닌가 한다.
중급 호텔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호텔을 운영하는 자부심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숙박비에 포함된 아침식사에는 빵 세 종류, 오믈렛, 찐 계란, 귀리로 만든 죽, 삶은 버섯요리, 꽁치를 닮은
생선졸임, 연어, 콘프레이크와 우유, 각종 잼들, 블린, 몇가지의 치즈, 소세지, 살라미, 피망과 오이, 오트밀,
수박과 복숭아, 자두 등의 과일, 몇가지의 차 종류 등등...... 가지수가 다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음식이 푸짐
하다.
이 호텔의 하루 숙박비가 7만원 정도인데, 얼마전 부산의 해운대 리베라 호텔의 8만원짜리 방에는 기본적
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방도 좁은데다 아침식사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네 호텔이라는 곳의 숙박비가 턱없이 비싸다는걸 새삼 느낀다. 한국의 호텔비가 비싸다고
세계적으로 이름났다는데, 남의 나라에서 새삼 그것을 확인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호텔 '해피 푸쉬킨'은 이 연미복 영감님의 독특한 취향으로 말미암아 객실을 나설때마다 살짝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바로 호텔의 색상 때문이다. 복도의 벽과 천정, 바닥 모두가 새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고, 복도 끝마다 대형 거울을 배치해 놓은 통에 커브를 돌때마다 자기의 갑작스런 모습에 깜짝
놀랄때가 많다. 게다가 아침식사를 하는 식당에는 의자와 탁자보를 새빨간 벨벳으로 치장해 놓아, 이 또한
살짝 당혹스럽다.
인터넷의 호텔 검색 사이트에서 예매를 했으므로(호텔닷컴) 이런 요상한 복도가 있는줄은 알 수가 없지.....
참 독특한, 한국에서라면 절대 들어가지 않을, 그러나 식사는 참으로 좋은 이곳에서 무려 4일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넵스키 대로에서 내려 지하철로 한 구간을 달려 페트로빠블롭스크 요새에 도착했다.
뻬쩨르부르그 시내와 바실리 섬의 중간에 위치한 작은 섬인 이곳에는 요새안에 성당과 박물관, 옛 감옥,
우주 박물관 등이 있다.
그 중 옛 감옥은 왕정때 혁명에 가담했던 인사들을 수감했던 방들이 있는데 생각보다는 1인실이 넓다.
침상 한 개와 책상 하나, 변기와 세면대, 등잔 하나가 전부인 똑 같은 방들이다.
요새를 나와 바실리 섬 쪽으로 1시간 넘게 걸었는데 마주 보이는 성 이삭 성당과 에르미타쥐가 네바 강
위에 아름답게 걸려있다.
바실리 섬에서 라스꼴리니코프의 흔적을 볼 수 있을까? 그가 마르파 할멈과 리자베따를 죽이고 빼앗은
금품을 묻은 '어느 집 모퉁이'가 눈에 선하다.
그는 그토록 거대한 상념으로 그토록 잔혹한 살인으로 얻은 금품에는 사실상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묻어
버린 것이다.
그는 애초에 그것을 팔아 돈으로 바꿀 생각보다는 '내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태연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비범인' 인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비범인'이 아닌것을 금방 깨닫고는 분노(!)로 치를 떨었던 것이다.
바실리 섬을 걸으며, 라스꼴리니코프가 외투에 두 손을 찌른채 고개를 숙이고 상념에 젖어 걸어가는 뒷 모습을
상상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뻬쩨르부르그의 마지막 밤이다. 돌아가는 날에 다시 이곳에 와야 하지만 곧바로 비행기를 타야 하므로 오늘이
사실상 마지막 밤이 된다.
뭔가 아쉬워 잠시 쉬다 다시 넵스키 거리로 나갔다. 입맛에 맞고, 가격도 좋고 분위기도 괜찮은 '마마 나 다체'
식당으로 갔다. 벌써 네번째 가지만 종업원은 아는체도 않는다. 이쪽 사람들은 무뚝뚝 하고, 붙임성이 없고,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같은 인사는 물론 잘 웃지도 않는다고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중가(中價) 정도의 레스토랑은 물론 호텔이나 다른 레스토랑의 종업원이 인사하는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상점은 물론이고 박물관 등등 어느곳이든 인사를 건네는 법은 없다. 유럽이나 뉴질랜드 등에서는 마주치는
누구와도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이곳엔 그런 미덕은 아예 없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다.
페트로빠블롭스크의 성당에서다. 성당을 둘러보고 그 곁의 기념품 가게에 뻬쩨르부르그를 소개하는 책자가
있어 그것을 한 권 집었다. 150루블이라는 가격표대로 지불하고 나서는, 한 권을 더 사야겠다 싶어 한 권을 더
집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들었던 지폐를(1,000인지 500루블 짜리인지를 잘 모르고) 주니 배가 불룩 튀어나오고
큰 덩치의 종업원이 내게 280루블을 거슬러 준다. 한 권을 더 집은 똑 같은 책은 220루블로 가격표가 붙었다.
같은 책인데 왜 가격이 다르냐니까 아까 그 책은 같은 책이지만 150루블이고, 이 책은 '새로운 가격'이란다.
웃기는 얘기지만 짧은 영어로 실랑이가 싫어 그냥 넘어가고, 거스럼 돈을 보니 280루블이라, 왜 780루블이
아니고 280루블이냐고 하니 '당신은 내게 500루블 짜리 지폐를 줬다, 그래서 280루블을 거슬러 준거다'라고 한다.
'아니, 1,000루블 짜리를 준 것 같은데?'
그제사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1,000루블짜리를 딴 곳에 쓰고 잔돈으로 500루블 짜리를 갖고 있던것이 생각난다.
'아! 미안, 내 실수다, 500짜리가 맞다'
다툰것도 아니었고, 내가 실수한 것을 금방 알아차려 사과를 했는데도 어렵쇼? 이 친구 아까 처음 한 권을 사면서
받았던 150루블을 내게 내밀고 500루블도 내게 내밀며 책을 달라고 한다. '너 같이 우기는 녀석에게 팔지 않겠다'는
얘기다.
시비가 벌어진 것도 아니고 잠시 착각에 의한 헤프닝이었는데 이 친구 금방 삐쳐버리고 만 것이다.
'에라이 밴댕이 같은 자식아!' 우리말로 한마디 하고 나와 버렸다. 물론 작은 실수였다. 우기지도 않았고, 금방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까지 했는데도 이 딱한 녀석의 심산은 10초도 안되는 사이에 뒤틀려 버렸던 것이다.
아마 똑 같은 책을 다른 가격에 팔고서는 그것에 의아해 하는 내게 좀 무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했다.
성당 기념품 가게의 밴댕이 녀석에게 돌려 받은 650루블.
넵스키 대로의 22번 트램 정류장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트램이 도착해서 타려고 하는데 뒤에서 마구 밀어
댄다. 복잡한 차가 아닌데 왜 이렇게 거칠게 밀어대나 싶어 돌아보니 20대로 보이는 청년들이다. 차안에 있는
두 녀석이 비어 있는 트램의 중간부분으로 가지 않고 나를 마구 밀어댄다. 앞뒤에서 청년 5-6명에게 포위 당한
꼴이 되어 있다가 갑자기 이 녀석들이 도로 우루루 내려 버린다. 그중 한 녀석이 내 윗도리를 밖으로 끌어내리듯
하다가 놓는다. 아니, 이 녀석들이 복잡하지도 않는 차에서 왜 이리 밀어대나? 또 내리면서 남의 옷은 왜 끌어
당기나 하는데 트램 문이 닫힌다.
이게 뭐지? 아차, 소매치기?...... 바지 주머니를 보니 650루블이 없다. 왼쪽 주머니의 스마트폰은 있고, 오른
손에 쥔 카메라도 그대로다. 카메라와 스마트폰을 뺏기지 않은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돈 12,000원 정도를 뺏으려고 5-6명이 그런 짓거리를......
잘 웃지않고, 인사하는 법 없고, 무뚝뚝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내 생전 당해 보지
않은 소매치기를 뻬쩨르부르그에서 경험하다니......
오늘은 이래저래 조금은 우울한 날이다.
그렇지만 뭐, 세상사 그런것이다. 뻬쩨르부르그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로마에서도, 이스탄불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