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웃지않는 사람들, 러시아
9월 7일. 일요일 (뻬쩨르부르그)
오늘은 러시안 박물관(또는 푸쉬킨 박물관이라고도 했다)에 가기로 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이 없기도 하지만 그냥 맞고 가기로 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
갈 때도 비가 왔었는데 이번에도 비라니, 박물관에 가면 비가 온다는건 운이 좋은 것이다. 실내에서
하루를 보내니 말이다.
러시안 박물관은 초입에서 부터 회화 작품들이 반긴다.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회화 작품이 많아서 좋다.
그런데 이 박물관은 참 매력있다.
어느 박물관이든 가면 누군지도 모르는 귀족이나 왕족, 군인들의 초상화나 궁전생활을 주로 한 그림들이
어두운 톤으로 잔뜩 걸려있어 짜증이 나곤 했는데 여긴 다르다.
우선 그림의 대상이 서민들이나 가난한 사람들, 핍박 받고 있는 군중, 시골의 목가적 풍경과 노동 현장,
일상 풍경 등이 대부분이다.
물론 귀족의 초상화나 장신구, 권력자들의 일상 등을 담은 그림들도 있었지만 소수다.
어찌보면 볼셰비키 혁명을 거쳐 왕정을 쫒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냈던 나라여서 인지 노동자,
농민, 어린이와 아낙네, 소박한 시골풍경 등이 나타내는 묘한 친근감이 좋다.
따뜻한 기분으로 오후까지 관람하고 나왔다.
여태껏 많은 박물관을 봐 왔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시대의
러시아를 추억하는 가장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수한 시대라고 표현하고 보니, 내가 러시아에서 기대했던 것이 어떤것이었나를 되돌아 보게 된다.
KGB 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이런 저런 편법을 동원해 장기집권 중인 푸틴이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고, 급격한 자본주의화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 묘한 이질감을 느끼던 차에
그런 소박한 그림들이 '순수의 시대'로 보였다는건 내 속의 성향 자체가 도무지 지금의 러시아와는 맞지
않는다는, 또는 실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도스또옙스키, 파스테르나크, 톨스토이, 솔제니친, 체홉, 고골리 등 걸출한 작가가 배출된 시대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지금의 러시아에 실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러시아만 그런가?
'세계화'라는 괴물은 전 세계를 '정신적 내용물' 없는, 천박한 세계로 만들어 버리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현상을 시대적 조류로 볼 것인가? 그 조류를 만들어 낸 괴물들은 누구인가? 바로 권력에 눈 멀고
돈에 눈 먼 자들의 '조류 조작'에 기인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독특한 향기가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이제는 어느 나라를 가도 똑
같은 냄새가 나고, 똑 같은 음식, 똑 같은 물건들이 진열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똑 같은' 세상이 완성된다면 이제 내가 배낭을 꾸릴 이유가 없어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