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웃지않는 사람들, 러시아
9월 6일. 일요일 (뻬쩨르부르그)
오늘 하루는 외곽에 위치한 뻬쩨르고프(여름궁전)에 다녀 오기로 했다.
숙소 인근의 트램 22번을 타고 우선 넵스키 대로로 간 다음, 쁠로사지 바스따니아의 메트로 1번을
타고 네 정거장째인 발찌스카야 역에서 내려 404번 버스를 타고 40분쯤 달려 여름궁전에 도착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5일쯤 지나니 지하철 타는 요령과 환승하는 방법, 그리고 숙소 인근의 버스 노선
파악 등 교통수단에 대한 눈트임이 생긴다.
뻬쩨르부르그의 지하철은 우리네와 비교할때 크게 다른것이 몇가지 있다.
우선 지하철 역사(驛舍)가 모두 반듯하게 다 있다. 우리네의 경우 지상으로 다니는 구간에만 역사가 있고,
지하의 경우 역사가 없이 매표 창구, 개찰구 등 역사 역활을 하는 시설들이 있지만 이곳에는 지상에 모두
역사가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환승 역사가 있는 곳에는, 예를 들어 M1, M3, M5 등의 각기 다른 루트 세 구간이
교차 통과하는 곳이라면 M1역사 따로, M3역사, M5역사가 각기 따로 인근의 지상에 있는 것이다.
역사 이름도 각기 다르다. 이점이 우리네와 달라서 처음 접하는 우리 같은 외국인들에게 혼란을 준다.
그렇지만 편리한 점은 우리네의 경우, 환승하려면 지하1층에서 지하 2층, 또는 2층에서 1층으로, 또는
맞은 편으로 한참 이동해야 하지만 여긴 바로 옆에 구간이 다른 객차가 운행되므로 몇 걸음만 가면 바로
환승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이한 점 또 하나는 역사에서 지하로 이동하는 에스컬레이터가 무지 길다. 우리네의 경우 보통 길어야
10 - 15m 정도지만, 여긴 무려 100m가 보통이다. 처음엔 에스컬레이터를 탔을때 위에서 밑을 내려다
보니 까마득할 정도여서 겁을 먹었던 것이다.
또 이 에스컬레이터가 어찌나 빠른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올라 타야 했다. 노약자나 어린이에겐
상당한 부담이 될 정도다.
물론 이 에스컬레이터는 2-3일 후에는 적응이 되었지만......
마치 탄광의 막장으로 치닫는 탄차를 탄 기분을 느끼며 지하로 빨려가면 맨 끝에는 예외없이 조그만
부스 안에 중년의 여성이 앉아서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를 주시하고 있다. 이들은 사고를 대비한 안전
요원이라는데, 역사의 지하도마다 제복을 입은 채 근무하고 있다.
이 빠르고 긴 에스컬레이터는 고장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하니 여기 처럼 계단이 아예 없는 곳에선
필요한 일이다.
또 하나, 지하철은 굉장히 속도가 빠르다. 굉음을 내며 달리는데, 운행시엔 옆 사람과 대화가 거의 불가능
했다. 역사간의 구간이 상당히 길어서(우리의 경우 1분, 길어야 2분 정도 운행구간이지만) 3 -4분 정도
달려야 하는 구간이 많았다.
객차는 낡아서 지저분하고, 여름철에도 냉방을 하지 않는지 지하를 달리면서도 작은 창문을 모두 열어 둔
객차가 많아 공기의 질이 의심된다.
또, 이미 러시아는 계급화 되어 버렸는지,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은 거의 100% 후줄근한 사람들과 젊은이
들이다. 지상에는 독일의 고급 브랜드 차가 엄청나게 많고, 이들이 지하철을 이용하진 않는다는건 명백
했다. 지하철은 저소득층, 지상의 자동차는 고소득층으로 뚜렸하게 구별되어져 있었다.
우리네의 경우도 이 정도는 아니다.
뻬쩨르부르그를 다닐려면 지하철을 많이 이용할 수밖에 없어 지하철 얘기가 길어졌다.
여름궁전(뻬쩨르고프)은 대단한 규모에 대단한 광경이었다.
들어서면 윗 정원이 있는데, 멀리 보이는 대궁전이 길게 보이고 대궁전을 비켜 지나가면 아래 정원으로 가는
길목에 매표소가 있다.
다른곳과 마찬가지, 이곳 역시 '매표소'라는 자기네 문자외에 티켓 오피스라는 영어 표기를 해 두었지만 진작
외국인들이 필요한 부분엔 전혀 영어 표기가 없다. 이삭 성당도 그랬고, 피의 구세주 성당, 에르미타쥐 박물관,
카잔 성당도 그러했다.
무슨 얘긴고 하니 매표소 정면에, 어떠한 곳을 보는데엔 얼마, 또 어떤 곳을 포함해서 관람하는데엔 얼마,
어른은 얼마, 어린이는 얼마, 카메라 촬영권은 얼마라고 씌여 있는데 이런 정보가 모두 러시아어로만 되어
있으니 외국인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은 남들이 사는것을 눈치껏 보고나서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매표원이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니 물어 볼 수도 없다.
러시아는 아직 관광 인프라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랫 정원은 '대 폭포'라는 분수가 엄청 많은데 계단식 분수시설이 압권이다.
분수 아래는 핀란드만 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길게 뻗어있고 그 끝에는 선착장이 있다. 수로의 양 옆으로는
굉장한 규모의 숲이 펼쳐져 있고, 대궁전에는 희황한 장식의 첨탑들이 황금빛을 발하고 있다.
정말 대단한 규모이고 굉장한 풍광이다. 그렇지만 저 멀리 선착장까지 돌아보고 되돌아 오는 길에서, 대체 누가
이 정원과 궁전, 대폭포라 불리는 분수를 만들었을까 하는 불편한 기분이 스물스물 끓는다.
귀족들은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이 분수 통로를 지나 저 숲속에서 희희낙락 했겠지, 여자들은 숲속을
울리도록 깔깔거렸을테고, 남자들은 거들먹거리며 여자들을 희롱 했겠지, 하인과 마부들은 주인을 위해
대기하고 있고 밤 늦도록 그들의 행락은 이어졌을테지.
이 어마어마한 궁전을 짓기 위한 자금은? 노동력은?
당연히 국가라는 권력을 업고 있는 귀족들이 농민을, 어민을, 그리고 상인들을 착취해서 얻었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이곳이 몹씨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보러 오지 말았어야지, 멍청한 녀석!' 하거나 '그런 착취가 있어서, 그리고 국가라는 권력과 귀족들이
주도해서 이런 세계적인 유산을 만들어 놓은 게야, 그래서 네도 구경하고 있다구!' 하면...... 할 말이 없다.
여름궁전을 나와 버스를 타려고 하니 타고온 304번 버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몇 대의 차에
올라 지하철행이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겨우 한 대가 레닌스키 지하철역으로 간다고 하여 올라탔다.
레닌스키 역은 1호선 지하철이라 목적지와 맞다.
버스는 거의 만원이다.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알 수 없던차에 옆자리에 마침 동양인 젊은 여성 둘이 있어
한국인이냐고 했더니 귀찮은듯이 맞다고 대답했다. 대답하면서도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건성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일단 안심이 되어 어디서 내리는냐고 물으니 '지하철 아무데나요' 하길래 이 친구들을 따라
내리면 되겠다 싶다. 나도 지하철 역에 내려야 하니 얘길 해 달랬더니 머리만 까딱 한다.
그런데 정작 레닌스키 역에 당도하자 아무 말없이 내려 버린다. 급히 배낭을 챙겨 내렸지만 영 기분이......
보아하니 여행객은 아닌것 같고 유학생인 것 같았는데, 처음 만난 동족에서 느낀 씁쓸함은 꽤 오래갔다.
'헬조선'이라고 떠들어대는 젊은이들에게 공감하는 바이지만, 저런 애들은 제 스스로 헬조선을 만들고
있는게 아닐까?
다시 넵스키 거리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네바 강변에 황혼이 지고 있다.
'네바 강변에서 타는 노을을 보리라'던 러시아를 향한 내 서문대로 네바 강변에 선 것이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저 타는 노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실리 섬 너머로 지는 노을에서 무슨 상념에
시달렸을까? 나는 범인(凡人)인가 아닌가를 치열하게 판가름 했을까? 아니면 이미 자신은 범인인 것을
깨닫고서 무너지는 자존감에 쓰린 가슴을 쥐어뜯었을까?
바실리 섬 뒤편으로 지는 황혼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성이다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