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웃지않는 사람들, 러시아
9월 3일. 목요일 (뻬쩨르부르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지만 에르미타쥐 박물관 개관시간이 10시 30분인 것을 확인하고는 느긋해졌다.
박물관 앞에 길게 늘어선 두 줄이 양쪽으로 200미터 가량씩 되어 보인다.
10시 30분 부터 늘어 선 줄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날씨가 갑자기 싸늘해 지기 시작함을 느꼈다.
챙겨 간 윗 옷을 겹쳐입고 매표소 앞에 들어서니 티켓은 주지만 돈을 받지 않는다고 도로 내민다. 왜?
영문 모르고 티켓(1장에 600루불이니 우리 돈으로 12,000원 가량으로 박물관 관람료치고 적은 돈이
아니다)을 들고 들어선 박물관 내부는 듣던대로 실로 대단한 규모다.
여태껏 다녀 본 박물관 중에서 단연 최고의 규모다. 하긴 세계 4대 박물관 중 한 곳이라니 말해 무엇할까.
점심을 박물관 내부에서 떼우며 수많은 회화와 조각, 유물 등을 보고나니 4시쯤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박물관을 빠져나와 저녁에 관람할 발레 공연장인 에르미타쥐 극장을 미리 확인한 후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발레 공연은 러시아 입국전에 숙소에 미리 이메일로 티켓을 부탁해 놓은 터였다.
공짜로 본 박물관(돈을 받지 않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 달에 한 번정도 그런 은전(!)
을 베푼단다. 운 좋게 그날에 들어간 것이다)의 횡재(!)에 간이 커져서 고급 레스토랑인줄 알면서도 호기
롭게 들어 간 바람에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발레 공연은 근사했다.
박물관 한 켠에 붙은 작은 극장이었지만 알차고, 충분히 만족할 만한 공연이었다. 23명 오케스트라는
훌륭한 기량으로 연주했고, 발레 공연자들의 기량도 훌륭했다.
발레 공연을 본 것이 이번이 세번째인 것 같은데, 이들의 연주와 춤을 보고 있으니 '아! 프로라는건 이런
것이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과연 발레의 본 고장답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인 관광객들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이들은 마구 헤집고 다니며 카메라와 캠코더를 찍어대는데, 촬영이 금지된 무대는 물론
돌아서서 자기 주변의 관객들을 태연히 찍어대는 통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젖거나 두 팔을
벌려 찍지 말라는 신호를 해도 아랑곳 없다.
그런데 이들의 특징은,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고서도 사람들과 일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들 외에는 모두 투명인간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미 다른 여행지에서도 많이 당해 본 경험이 있지만 이들의 행태는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면 자기들이 사진을 찍는데 방해가 되면 옆사람을 그냥 밀쳐버리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안나푸르나의 롯지 식당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도 옆에 벌렁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여러번 목격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이들의 상식밖의 행태가 언제까지 이어질런지......
요즘은 어딜 가도 가장 숫자가 많은 중국인들이니 이들을 적당히 피해 다니는 수 밖에......
숙소에 들어오니 밤 11시, 하루종일 무리한 다리가 뻐근하다.
그런데, 하루를 생각해 보면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이들의 직업에 관한 것인데,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그 수많은 방들에 배치된 할머니들(대략 70세 이상의
전시물 보호 역활을 하는)과, 거리마다 있는 유료 화장실 할머니들, 역사(驛舍)안의 제복 입은 경비원들,
지하철 탑승구 에스컬레이터마다 배치된 안전요원인 중년의 여성들, 버스와 트램마다 배치된 중년의
검표원 등등......
하루를 보내며 계속 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생각은 '이들과 우리네' 라는 거였다.
'첨예한 경쟁과 이윤 추구의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상념이다.
이들은 우리네 기준으로 본다면 소위 '재배치' 또는 '인원 감축' 또는 '자동화를 통한 인원 절감'의 대상이며
우리네 웃기는 정부가 얘기하는 '비정상의 정상화'에 해당하는 것이고, '노동시장 개혁'의 대상들 같아
보인다.
이들의 과학 기술 수준으로 보면 이런 체계의 '자동화'를 못해낼 수준도 전혀 아니니......
이들의 정책이 천박한 경제적 이윤과 효율 추구의 대상이 아닌 '직업을 주기 위한 국가의 방편'이라면?......
내가 보기엔 이들이 우리네 보다는 훨씬 제 국민들을 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개혁'을 해서 즐거워지는 쪽은 누구인가? 국가이고 기업이다. 그들이 즐거워지면 '국가 경쟁력
향상'이라고 떠들어 댈 녀석들이 많겠지만 그 '국가'는 향상된 국가의 경쟁력을 어디에다 써먹고 있을까?
복지에는 인색하고, '업자 먹여 살리기에는 충실한 녀석들'로 가득찬 나라 아닌가. 한국이라는 나라는......
'국가 경쟁력이 향상'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국민의 복지가 향상되고, 직업이 안정되고, 경제가 안정되고,
밤낮 들먹이는 '국방력'이 굳건해져야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게 없으니 그놈의 '국가 경쟁력은
어디에 써먹고 있는가 말이다.
국가 경쟁력에 몰두할게 아니라 '국민 경쟁력'에 몰두해야 할 녀석들이 요즘은 아예 노골적으로 뻔뻔해져
서는 아예 대놓고 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시장을 개혁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재벌들을 옹호하고 감싸는
그런 짓을 하고있다.
얘기가 엉뚱하게 흘렀다.
옛 사회주의의 나라보다 못나 보이는 내 나라가 이 밤중에 생각나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