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17)달과 별이 그려진 선홍빛 나라 터키

운농 박중기 2014. 7. 4. 11:04

2014. 6. 7(토) -이스탄불-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사프란볼루에서 이스탄불 까지의 6시간 30분간의 버스 길은 참 매력없다.

여태껏 도시간 이동에 이런 길은 처음인 것 같다.

마치 대전을 지나 서울까지 이어지는 우리네 고속도로변 처럼 줄줄이 공장과 주택, 어설픈

농지가 뒤섞여 있는 볼품없는 길과 너무 닮았다.

별다른 풍경도 없고, 표정도 없는 길이다.

이스탄불의 오토가르에 도착하여 제톤을 사서 지하철을 타고, 다시 트램으로 갈아 타고선

귤하네 역에서 내려 어제밤에 '부킹닷컴'을 통해 예약한 '악치나르' 호텔에 짐을 풀었다.

처음 이 나라에 왔을때는 귤하네 역에서 한 정거장 위인 '술탄 아흐멧' 역에서 내렸지만

귤하네 역에서는 우리가 이스탄불에서 더 보고자 했던 탁심광장과 에미네뉴 항, 갈라타

다리 등이 가까워 선택했다.

 

동행한 한국인 커플은 우리처럼 배낭으로 짐을 꾸린게 아니라 큰 케리어 2개로 짐을 가지고

다니는 바람에 지하철을 타거나 트램을 탈때 불편하기 짝이 없었는데, 예를 들어, 지하철을

탈때나 트램을 탈때 밀고 들어가는 금속봉에 손잡이가 걸려 무거운 짐을 금속봉 위로 들어

올리느라 애를 먹었고, 이스탄불의 많은 보도가(유럽의 보도가 대부분 그렇지만) 돌 조각을

박아 평평하게 만든 길이라 케리어의 바퀴가 덜덜거리고 잘 끌려오지 않는지라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런데다 에스칼레이터 없는 계단길이 많아 무거운 케리어를 들고 다녀야 하는 등, 이건 보통

노동을 요하는 노릇이 아니다.

그들은 그럴때마다 겸연쩍게 웃고는 다음 여행 부터는 케리어는 절대 사양하겠다며 배낭을

맨 우리를 부러워 했다.

우리는 출발할 때 짐을 최대한 줄여 내가 맨 큰 배낭은 11킬로그램 정도, 아내가 맨 작은

배낭엔 3킬로그램 정도 였으므로 가쁜한 무게였다.

통상 우리네 젊은 여행객들은 거의 대부분 케리어를 끌고 다니는데, 체코 여행때에 젊은

커플에게 왜 힘든 케리어를 끌고 다니느냐고 물었더니 '모양 빠지잖아요!' 하는거였다.

하긴 그땐 우리도 처음으로 케리어를 끌고 다녔는데 그 불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한차례외엔 케리어는 우리에게서 제외됐다.

유럽의 멋진 거리를 배낭을 메고 다니면 모양새가 나지 않는다는 건데 뭐, 그들을 책망할

이유는 없지만 케리어라는 물건이 장기간 배낭여행때엔 얼마나 불편한 물건인지를 모르니, 

아니, 감수하겠다니 어쩔 수 없다. 

여행사가 인솔하는 패케지 여행이라면 크게 상관 없겠다. 어디든 교통수단이 대기하고 있고,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현저히 줄어드니 말이다.

카파도키아 여행때에 만난 한국인 부부는 우스개로 이런 얘기를 했다.

어느 부부에게서 들은 얘긴데, 그들은 케리어에 짐을 잔뜩 넣어 모두 합쳐 30킬로그램 정도

되었는데, 너무 힘들어 하던차에 어느날 케리어 한개를 잃어 버렸다. 그 후로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고 하는 바람에 소리내어 웃었었다.

 

우리 돈으로 8만 몇천원 짜리 호텔방, 둘이서 엉덩이가 스치도록 좁아터진 방은 깨끗하긴 하나

처음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묵은 9만원 짜리 동양호텔과 다를바 없다.

정확히 보자면 우리네 모텔방 딱 반쯤되는 넓이다.

세계의 여행객들이 모이는 인구 천 팔백만의 도시이고, 여기는 그 중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술탄 아흐멧, 귤하네, 시르케지 인 까닭에 높은 땅값이 이런 호텔 구조를 만든 것 같다.

귤하네 역에서 트램을 내려 호텔을 찿아 경사진 길을 내려갈때, 주말이기도 했지만 윗쪽 술탄

아흐멧 역 쪽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인파를 봤을 땐, 아하! 이곳의 호텔 방이 이다지도

좁은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먹고, 자고 해야하니까......

이제부턴 이 지역의 호텔방 넓이를 이해 하기로 했다......

 

우리는 짐을 풀고 잠시 휴식후 에미뇌뉴 항에 가서 보스포르스 해협을 1시간 가량 유람하는

배를 타고 동양과 서양을 가르는 해협을 횡단했다.

동양쪽은 불빛이 약하고 서양쪽은 상대적으로 환하다.

동양쪽은 위스크다르 등 주거지역이 많고, 서양쪽은 유적 관광지가 많으니 당연하다.

밤이지만 수많은 인간 군상이 쏟아져 나와 있고, 항구와 갈라타 다리, 그 주변에 포진한 수많은

노점, 길바닥에 온갖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방물장수, 다리 한귀퉁이의 걸인, 줄지어 깃발을 따라

다니는 중국인(이제는 일본인이 아니다!), 좁은 도로 중앙을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리는 트램,

골목마다 케밥과 교프테 굽는 연기들, 군밤 장수와 군 옥수수 장수들, 엄청나게 살찐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이 나라 중년 여인들,

우리를 보고 '안뇽하세요! 니하오마! 곤니치와 ......'를 외치는 되뇌르 케밥 장수들......

'삶의 현장'이 따로 없다.

인도 바라나시 정도의 혼잡과 혼란은 아니지만 그 차석은 차지할 만 하다.

이스탄불...... 동로마 시대엔 콘스탄티노플 이라 불리던, 그  이름에서 풍기던 묘한 동경심, 그리고

강한 호기심, 신비감이 있었지만, 여기도 별 수 없이 엄청난 인구가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 치는

치열함의 도시에 불과했다.

톱카프 궁전, 아야 소피아, 블루 모스크, 그리고 수많은 자미들, 그 자미들 마다 치솟은 미나렛이

이 도시를 참 묘하게 만들지만 닳고 닳은 도시인의 치열한 전쟁터이긴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런 기운이 훨씬 많은 도시처럼 보인다.

갈라타 다리 아래 지하도엔 가난한 청년 방물장수들이 담배 수십개를 상자위에 늘어 놓고 팔고 있고,

500원 짜리 생수통을 얼음위에 쟁여놓고 파는 어린 아이들, 장난감 인형을 태엽감아 춤추게 하고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애원하듯 권하는 노인......

이스탄불은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부자와 빈자가 뒤섞인 거대한 도시였다.

 

우리는 보스포르스 해협을 횡단하는 유람선 위에서 서양쪽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자미를 보면서

이스탄불을 가슴속 깊이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