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 (로마)
떼레베 강은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강 폭이 작은 다리 하나 건너면 될 정도다.
시오노 나나미가 그토록 자주 언급하던 떼베레 강의 색깔은 누런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닌, 표현하기 힘든
색깔이다. 탁한, 그러면서도 찐득한 듯한 석회수 같은 물빛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왜 저런 색깔인지 알순
없지만 아무튼 강물에서 어떤 감상을 찾긴 힘들다.
그렇지만 그 위의 다리는 아름답다. 싼 탄젤로 다리다. 베르니니가 만들었다는 천사상 10개가 다리 가장
자리에 세워져 있는데 그 조각상이 예사롭지 않게 멋들어지다.
바티칸 시국과 로마시내를 잇는 이 다리는 어찌보면 체코 프라하의 까를교에 있는 조각상과 비슷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근사한 포즈로 세워져 있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마치 천사들이 살아있는듯 생동감 있다.
싼 탄젤로 성은 큰 규모의 원형 성으로, 그 원형의 성을 바깥에서 다시 원형으로 성벽을 쌓아놓은 형태다.
굉장한 규모다. 성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로마 시내 전경이 아름답다.
그러나 아침부터 시종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체감 온도가 떨어져 자꾸 따뜻한 곳을 찾게 된다.
교황청이 위험에 빠지면 교황이 피신하여 은신하는 곳이라 하는데, 당시의 교황이 그렇게나 자주 위험에
빠졌는진 모르나 지나치게 견고한 성의 위용에 조금은 위압감과 거부감이 든다.
당시엔 교황이 엄청난 권력자였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싼 탄젤로 성을 빠져나와 성 베드로 광장과 연결된 '화해의 길'을 걸어 광장 입구에 들어가 한쪽 대리석
벽면에 기대 앉아 미리 사온 콜라와 빵, 사과로 점심을 떼웠다.
여태까지 로마시내를 꽤 헤매고 다녔지만 소위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은 없다. 태국과 베트남, 라오스 등
동남 아시아에서 흔히 보는 길거리 음식을 이곳에서는 아예 본 적이 없다. 그런 문화 자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당국의 규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행객이 넘쳐나는 도시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길거리 음식은
없다.
그러니 좀처럼 찾기 힘든 수퍼마켓만 발견하면 이것 저것 사게 되는 것 같다.
광장은 인파로 붐비고 며칠 전보다 훨씬 복잡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주말.
성 베드로 성당을 한번 더 보려고 갔지만 너무 많은 인파가 금속 탐지기 앞에 줄을 서 있는 바람에 포기하고
발검음을 옮겼다.
며칠 계속 걸었더니 허리와 다리가 묵직하다.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유난히 걸인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바티칸이 가까운 탓일테다. 다친 다리의 상처를 내놓고
구걸중인 중년의 남자, 성모 마리아 그림엽서를 앞에 놓고 구걸중인 중년 여자, 강아지 두마리를 앞에 두고
이색적으로 구걸중인 남자...... 그런데 이 두마리의 강아지가 어찌나 불쌍한 눈을 하고서 행인들을 쳐다
보는지, 이 걸인의 깡통에 동전이 제법 쌓였다. 구걸도 차별화, 특화화 해야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돌아 다니면서 시내 곳곳에 산재한 성당들은 거의 빼놓지 않고 들어 갔는데 (성당은 조용하고
한산해서 지친 다리를 쉬기에 안성맞춤이다,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에서 그 많던 절에 들어가 용변을 해결하고
쉬었던 것처럼) 성당 문 앞마다 걸인이 깡통을 놓고 동냥 중이었다.
또 한가지 특이한 것은 로마시내를 걷다보면 젊은 청년들이 엄청 많이 돌아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가끔
우리네 생각대로 '일과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저들은 왜 저렇게 많이 거리에 있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들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나그네로서는 뭐......
민박집 주인장의 얘기로는 로마의 젊은이들이 일을 하기 싫어하고 노는것만 좋아하며, 서비스업이 많은 로마
시내의 상점이나 식당을 가면 노인네들이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거리에서 보면 그 말이 다 맞다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좌우간 젊은 남녀가 유달리 많은것은 사실이다.
일을 정말 하기 싫은건지, 아니면 일자리가 없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곳곳에 젊은 청년들이(젊은 여성보다 훨씬
많다) 멋을 잔뜩 부린채 돌아 다니는 것이다.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문에 경계심을 늦추진 않았지만 특별히 위협적인 상황이나 그 비슷한 낌새는 한번도
느낀적은 없었다.
다만 로마 시민들이 전반적으로 조금 지쳐 보이고 활기가 없으며, 좀 궁색해 보이기까지 하는것을 많이 느꼈다.
뭐,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그 시대의 로마는 분명 아니지만, 그 시대를 유추하기엔 너무
거리가 있다.
저녁식사는 이 집의 손님이 나혼자인 까닭에 주인 아주머니와 둘이서 했다.
연변에서 로마까지 흘러 들어와 민박업을 하고 있는 이 양반의 사연이 참으로 궁금하던차에 둘 만 있게 되니
호기심이 발동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55세의 주인장이 들려주는 인생항로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에 대하소설 감이다.
맞벌이를 하며 연변에서 전기회사에 재직하는 남편과 아들 딸 낳고 살다가 자신이 다니던 회사가 부도를 맞게
되어 실직하고 나서 자연히 살림이 전보다는 곤궁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그녀는 남조선이라고 표현
했지만)에 가서 돈을 벌자고 결심하여 남편과 시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행 비자를 구하려고 한국인
브로커를 만났는데 사기를 당해 빚을 지고 말았다. 두번째 같은 시도를 했지만 또 다른 사기꾼을 만나 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제는 늘어난 빚이 다급해져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라도 가서 돈을 벌어야 겠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어 이탈리아로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고 한다.
당시의 연변에는 한국이나 이탈리아, 프랑스 등으로 돈을 벌러 떠나는게 유행처럼 번져 있어서 자신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의 진출을 시도하던 때였다고 한다.
결국 몇번의 시도 끝에 여자 3명과 남자 1명이 그룹이 되어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입국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프랑스로 일단 밀입국하여 몇개월을 숨어 있다가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들어 갔다 한다.
처음엔 중국인의 소개로 이미 정착해서 합법적으로 살고 있는 중국인 가정으로 들어가 갖난 아이를 돌보고, 집안
살림을 했는데 중국인 특유의 대식구 살림이라 너무 힘들어 그곳을 나와 식당, 냉동창고 등등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경찰의 단속을 피해가며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 몇년 후 너무 고된 노동에 몸이 망가져 한때 병원에 거의 1년 동안 입원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등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자금을 조금씩 모으게 되어 건물의 한 층을 임대하여 지금의 민박집을 운영하게 되었다 한다.
당시에 연변에서 건너온 자신과 비슷한 행로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민박업에 종사하게 되어, 현재 처럼
로마에 한인 민박집이 연변 사람들로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지금은 영주권을 받은 합법적인 신분이 됐고, 민박 운영업도 합법적이라 한다.
이제는 빚을 다 갚고, 아이들 대학까지 마치게 되어 여유를 가졌지만, 아직도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일손을
놓을 수 없다 한다.
말썽없이 가정을 지켜준 남편에게 고맙고, 반듯하게 자라준 아이들에게서 보람을 느낀다는 이 여성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편의 대하 드라마 같아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20년 가까이 타국에서 죽을 힘을 다한 이런 자기 희생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걸까?
가정과 자식에 대한 의무감? 그런 것 만이기엔 이 여인의 고통은 너무 가혹했던 것 같다.
얘기 곳곳에 고비를 넘기는 에피소드를 들을때면 마치 재미있는 영화 같기도 했지만 이 여인이 겪은 고통을 영화
라고 하기엔 잔인하다.
그녀는 자신의 행로를 격정적으로 털어놓고 긴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긴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내일은 베네치아 행, 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로마로 돌아올 때 그녀를 위한 작은 선물이라도 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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